조선시대에는 왕과 백성들간 토지소송이 심심찮게 제기됐고 종손(宗孫)은 재산은 물론 호주ㆍ제사권 상속을 모두 인정받았다. 축첩은 법적으로 공인된 제도였다.
대법원 산하 법원도서관이 18일 펴낸 ‘고등법원 판결록 민사편’에 나타난 100여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법과 관련된 생활상이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2~191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의 판결이 수록된 책이 편찬되기는 이번이 처음. 당시 법원은 1심 지방법원, 2심 복심법원, 3심 고등법원으로 구성됐으며 고등법원은 현재의 대법원에 해당한다.
판결록에 따르면 왕실에 대한 백성들의 소송제기도 종종 있었다. 정모씨는 1914년 창덕궁에 살던 왕(순종)을 상대로 낸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에서 패하자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정씨는 홍릉(명성황후의 묘)의 경계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자신 소유 땅과 분묘가 편입되자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종손은 막강한(?)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종중 구성원인 최모씨는 “문중의 종손에게 호주권ㆍ재산권ㆍ제사권 등 세 가지 권리를 가진다고 인정한 것은 당사자가 신청하지도 않은 것을 인정한 것이므로 위법하다”면서 종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종손으로서 본계(本系)의 상속을 하는 경우 호주권ㆍ재산권뿐 아니라 제사권도 상속하는 게 조선의 관례”라면서 기각했다.
또 남의 돈을 빌렸다가 1ㆍ2심 재판에서 진 개화파 정치인 박영효 측이 대리인을 내세워 항소심 판결을 뒤엎기 위해 법리논쟁을 벌이고 매국노 이완용이 일본인과 땅 소유권을 놓고 다툼을 벌인 사실도 판결록에서 드러났다. 이 책에 수록된 고법 판결ㆍ결정 112건은 이처럼 다양한 조선인들의 법생활을 엿볼 수 있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판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이미 현대인이 갖는 권리ㆍ의무ㆍ책임ㆍ계약관계 등의 근대적 법 관념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