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가 위기에 빠진 것은 과도한 복지 체제에서 비롯됐다. 이로 인해 천문학적인 빚더미에 앉은 그리스는 유럽연합(EU)와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 인들은 이제 혹독한 긴축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재정적자는 그리스 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발 재정위기는 그간 유럽 각국에서 늘려온 사회보장제도를 강타하며 대수술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는 지난해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13.6%에 달했다. 적자 예산이 십 수년째 기록하면서 지게 된 빚만 3,000억 유로에 이른다. 가계로 치면 마이너스 통장을 쓴 셈인데, 이젠 그 수치가 한해 총 소득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스가 막대한 부채 위에 앉게 된 것은 분수를 모르는 사회보장제도 때문인데, 이는 포퓰리즘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리스에서는 사회당과 신민주당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인기 위주의 정책을 쏟아냈다. 오랜 기간 군정 치하에서 억압받았던 사회당은 1980년대 집권 기간에 좌파 인사들에게 대거 평생 직장을 제공하며 공공부문을 늘렸다. 2004년 집권한 우파 신민주당 역시 겉으로는 경제 자유화를 약속했지만 일자리를 주고 표를 얻는 관행을 이어갔다. 신민주당 집권 5년간 증가한 공무원 숫자만 7만5,000명이다. 그리스에서는 공공부문 종사자의 25%가 과잉인력으로 분석되고 있다. 처우도 유럽의 다란 나라보다 훨씬 낫다. 1995~2008년 공무원의 연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은 3.1%로 유로존(유로화를 함께 쓰는 16개국) 평균인 1.25%의 두 배가 넘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사회보장 지출은 점점 늘어났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그리스의 사회보장 관련 지출은 2006년 기준으로 GDP 대비 18%에 달해 OECD 평균 15.2%를 뛰어넘었다. 사회보장 지출 증가에는 관대한 연금체계가 한몫 했다. 그리스의 임금 대비 연금액 비율은 95.1%로 OECD 최고 수준이다. 다른 나라들이 근무기간 전체 혹은 15~35년 임금을 기준으로 연금 액수를 산정하는 데 반해 그리스는 퇴직 전 5년간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해 연금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 위기가 펑펑 퍼주는 연금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어쩔 수 없이 지원에 나선 독일에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경제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국민이 자신들보다 10년이나 일찍 퇴직하고 연금 혜택을 받는 그리스 국민에 분노해 '유로존의 협잡꾼'이라 비난했다고 전했다. 독일 자민당 내 경제통 프랑크 셰플러 의원은 "그리스는 무인도나 파르테논 신전 등 먼저 팔 수 있는 걸 파는 게 순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그리스는 유로존과 IMF로부터 1,100유로의 구제기금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 대가는 혹독한 긴축이다. 그리스 국민은 앞으로 공무원 복지수당 8% 추가 삭감과 특별보너스 폐지, 여성 연금수령 연령 60세에서 65세로 상향, 60세 이전 조기연금 수령 불가 등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견뎌야 한다. 복지 혜택 축소는 그리스 같은 '문제아' 국가만의 얘기가 아니다. 유럽인들은 그 동안 긴 휴가와 조기 은퇴 후 넉넉한 연금, 전국적으로 잘 갖춰진 의료보험 시스템이라는 유럽적 복지를 향유해왔다. 이는 자발적인 동기 유발로 부국의 꿈을 실현시켜줬지만, 이제는 고령화로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바뀌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럽식 사회복지 모델은 냉전시기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군비 지출을 크게 줄이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이제 세입 축소에 다른 긴축정책으로 정부 지출이 줄어들었고, 인구구조도 사회복지 모델제도들을 유지하기에는 부정적인 환경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유럽식 사회복지 모델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독일 군국주의와 실업, 전쟁이란 치 떨리는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고민과 함께 유럽 각국에 속속 들어선 좌파 정권들이 기획한 정치ㆍ사회적 산물이다. '성장'은 추구할 만한 것이었지만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은 아니란 공감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 냉전 종식 후 더욱 여유가 생긴 국방비 덕분에 복지 확장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 모델은 점점 지속 가능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앞으로 몇 년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정책을 둘러싼 괴로운 싸움이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국에서는 당장 복지 축소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영국은 올해 재정적자가 GDP의 12%에 달할 것이라고 EU로부터 경고받았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집권한 지난 13년간 복지 혜택이 크게 늘었다. 60세 이상 노인은 재산이 얼마든 무료로 버스를 탈 수 있고 연간 250파운드의 난방보조금을 받는다. 신생아에게는 소액 채권이 주어지고 저소득 가정의 학생들은 교육 보조금 혜택을 누리게 됐다. FT는 1997년 노동당 집권 할 때 36억 파운드 였던 저소득 가정의 어린이에 대한 복지예산이 현재는 240억 파운드로 불어났다고 전했다. 영국이 2009년 현재 GDP의 11.6%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2014년까지 절반으로 줄이려면 370억 파운드의 공공지출을 삭감해야 한다. 그러나 신생아 소액채권, 무료 버스 승차 등 노동당이 추가로 도입한 복지 혜택을 모두 없애도 일년에 100억 파운드를 절감하는 데 그친다. 금융위기로 정부 지출이 급속히 늘어난 서유럽 국가들도 미래의 연금, 의료, 사회보장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독일은 2012~2019년 공공연금 대상자 퇴직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연장키로 했고 정년이 60세인 프랑스도 연금 시스템 개혁에 착수했다. 앞서 위기를 경험한 아일랜드는 최근 과감한 긴축정책을 발표해 금융시장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 예산 7억6,000만 유로를 삭감하고 경찰ㆍ교사 급여를 15% 줄이는 고통을 겪었다. 잇단 복지 축소 움직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영국 국가평등위원회 위원인 루스 리스터 러프버러대학 교수는 "복지국가의 핵심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며 "(복지 혜택이 줄어들면) 더 불평등하고 기회의 균등이 사라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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