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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밤 하늘의 별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영롱한 별들이 가슴 속으로 내려 앉는다. 일본과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 최재은(59)의 작품 '유한성(Finitude)'이다.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2관에서 5년만에 그의 국내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안내원이 불빛으로 발끝을 안내해줘야 할 정도로 깜깜한 전시장. 3개의 벽면에 밤 하늘이 펼쳐진다. 독일의 스토르코프(Storkow)에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세 방향의 밤하늘을 실시간으로 찍은 것이다. 때문에 전체 상영시간은 해질 무렵부터 새벽까지 약 8시간. 멈춘 장면인 듯하지만 달과 별, 구름과 공기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어떤 시간에 감상하느냐에 따라 새까만 밤하늘과 마주할 수도, 북두칠성이나 오리온자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함께 들리는 "또각또각"은 작가의 구두굽 소리다. 무한한 자연의 광경과 유한한 인간의 소리가 짝을 이룬 작품이다. 작가는 "나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커튼 안 어두운 공간의 작품을 관람하고 한 15분 정도 지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가져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쌀쌀한 가을, 불황과 장기 저성장으로 팍팍한 삶 속에서 '오래된 시(詩)'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힐링(치유)과 위로, 사색의 시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1층 작품이 밤하늘이라면 2층은 태양빛을 담았다.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지역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장면을 1분 간격으로 촬영한 50점의 사진이 걸렸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암흑의 공간에서 생명 탄생의 빛 공간으로의 전환을 표현했다. 그 옆 3장의 파란 사진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하늘인데, 같은 자리에서 1분 간격으로 24시간 동안 하늘을 찍은 1,440장 중 고른 것이다. 시간대에 따라 회색의 새벽, 붉은 황혼, 검은 밤하늘이 존재하는 작품의 일부다.
작가 최재은은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거장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해 온 그는 1995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 '일본관' 대표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백남준이 1993년에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참가했던 것처럼 국적을 초월해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상파울로비엔날레, 아시아태평양트리엔날레, 프라하트리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한국인 최초의 도쿄 하라미술관 개인전 등에 참가한 작가는 삼성의료원에 설치된 '시간의 방향', 해인사 성철스님의 사리탑 '선의 공간'을 작업하기도 했다.
1986년부터 여러 겹의 종이를 세계 각지의 고고학 발굴ㆍ유적지에 수년간 묻은 뒤 꺼내는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작가는 세월의 흔적으로 빛 바랜 종이를 통해 서로 다른 장소의 문화와 역사, 흙의 생명성 등 '시간의 지층'을 보여줬다. 그간 '땅'으로 향했던 관심이 최근작에서는 '하늘'로 이동한 것. 2010년 이후 일본에서 독일 베를린으로 활동지역을 옮긴 후의 변화다. 전시는 22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