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서 겨울바람에 강하게 버티던 일년생 잡초들의 잔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싹들이 돋아난다. ‘일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때문인지 잡초들은 새싹보다도 빠르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봄’이 되면 주변에서 겨우내 추위와 삭막한 계절을 버텨오던 병약하시거나 연로하신 어르신들의 부음을 자주 접하게 된다. 긴장했던 생명에 대한 집착이 나른한 봄바람을 맞이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풀리기 때문인 모양이다.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조문을 가게 되면 아마도 대부분의 문상객들은 상주의 현직과 위치에 따라 다르게 마련된 빈소를 통해 저마다 어떤 느낌을 하나씩 달게 된다. 또는 이미 현생을 떠난, 나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망자의 인생을 빠르게 회고해보거나 유추해보게 된다. 특히 망자가 나와 아주 직접적인 관계에 있었거나 상주가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허망하게 사라지는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가족ㆍ친지ㆍ이웃ㆍ직장동료ㆍ선후배ㆍ친구들 등 늘 만나게 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야지 하고.
그러나 그뿐,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우리는 복잡하고 미로 같은 삶의 갈등과 자기욕심, 돈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는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 일요일 우리는 지극히 아름다운 선종(선생복종: 善生福終)을 만났다.
바로 카톨릭 교회를 27년간 이끌어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이다. 본인이 카톨릭 신자는 아니어서 직ㆍ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보여준 사랑과 대화, 화해의 미소와 임종 직전의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라는 유언이 이번주 내내 가슴 속을 맴돌고 있다.
더욱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구권 시련의 국가이던 폴란드 태생으로 시인이며 극작가이고 직접 연극 활동을 한 배우였을 뿐 아니라 학적 역량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분이었으며, 교황 취임 후 130여개국을 직접 방문하며 종파를 뛰어넘는 ‘사랑과 평화’를 전달하고 실현하기 위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지 않았던가.
그분이 마지막으로 던진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과연 행복한가.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범인들에게는 행복질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무한히 충만한 신의 가호나 심신의 수련으로 얻어지는 그런 비범한 행복이 아닌, 범인들이 느끼는 즐거움ㆍ사랑ㆍ기쁨과 같은 것을 행복의 질량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평생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질량은 누구나 일정 수준 정해져 있고 세월이 흐를수록 줄어드는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만남, 진정한 웃음, 새로운 경험과 모험, 강한 우정과 사랑의 느낌, 베풀고 여유를 갖는 마음, 남에게 줄 수 있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 뜻하지 않은 행운…. 이런 것들이 행복의 모티브가 아닐까.
이런 모티브는 지나친 욕심으로 점차 그 빛을 잃고 무리한 금력(金力)과 권력(權力)의 추종 과정에서 그 기준을 잃어갈 뿐 아니라 대를 이은 부와 권력의 인위적인 세습 과정에서 무참하게 파괴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남는 행복의 모티브는 출생ㆍ합격ㆍ입학ㆍ만점ㆍ1등ㆍ금메달ㆍ졸업ㆍ축재ㆍ결혼기념일ㆍ우승ㆍ승진ㆍ행운ㆍ최고ㆍ최대 등 아주 직설적이고 숫자로 되풀이되는 더 이상 행복의 질량이라고 할 수 없는 제한된 것들은 아닌가.
행복질량 불변의 법칙을 깬 이 시대 성인의 선종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