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식물정부 전락하나]"내 코가 석자인데 실무회의·사업추진은 무슨… "손 놓은 관가

총리후보 낙마에 지방선거·개각 앞두고 '몸사리기'
직원도 교체설 장관 왕따·국장급은 신문만 뒤적
하반기 경제운용 등 차질… 후임 인선 서둘러야

총리 후보자의 낙마와 대규모 개각설 등으로 관가가 뒤숭숭한 가운데 29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공직자들 뒤로 정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이호재기자

한 광역지방자치단체의 협력관으로 일하고 있는 A씨는 요즘 진땀을 빼고 있다. 내년도 예산 때문이다. A씨는 "우리 도에 배정될 정부 예산을 요청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부리나케 유관부처들을 드나들고 있는데 도대체 실무자나 간부들이 민감한 이슈나 사업은 건드리려고 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예산 배정 받기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힘든 과정이지만 올해는 유독 더 심한 것 같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지자체 관계자가 전한 요즘 중앙정부 부처의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삼삼오오 모여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얘기를 하는가 하면 개각 폭은 어느 정도일지, 어떤 부처의 장관이 바뀔지 등의 얘기를 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퇴임 후 나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으로 미래를 어떻게 짜야 할지 등에 대한 고민도 나눈다. 업무에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업무 이외의 것에 많은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태와 6·4 지방선거, 개각 파동 등의 격랑 속에서 정부 관료들은 불안감으로 잔뜩 엎드려 있기도 하다. 시범 케이스로 찍히지 않기 위해서다. 경제, 사회, 국방·안보 등 전 영역에서 국가 차원의 중대 현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지만 대응 시나리오를 짜고 긴박하게 움직여야 할 정부 공무원들은 뒤숭숭한 정국에서 혹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몸조심'하기 바쁜 모양새다.

경제부처의 한 간부는 "하반기를 앞두고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재점검해야 하는 시기인데 대체로 유관부처나 기관들이 몸을 사리는 것 같다"며 "실무회의를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부처도 드물고 기존에 발표됐거나 이미 협의가 끝난 내용을 재탕해서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고 전했다. 또 다른 경제부처 관계자는 다른 부처에 실무회의를 제의해도 상대방으로부터 '우리 장관의 거취가 어떻게 될지 몰라 부처 방침을 확정하기 어렵다'거나 '중요한 이야기는 선거 후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무공무원들의 이런 분위기는 윗선에서까지 감지될 정도다. 정부부처의 한 고위인사는 "요즘은 밑에서 우리 장관에게 올리는 보고도 눈에 띄게 뜸해졌다"고 전했다. 벌써부터 개각 입방아에 오르는 일부 각료들을 휘하 막료들이 왕따시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정책뿐 아니라 부처 직원들에 대한 인사 역시 기약 없이 표류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정부부처 국장급 인사는 "1급 인사도 연초부터 난다고 하던 것이 최근에야 났는데 후속으로 이뤄져야 할 국장급 인사는 더 기약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이어 "지금 업무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인지, 좀 있으면 짐을 싸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이 뒤숭숭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요즘은 그냥 신문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큰 일과가 됐다"고 덧붙였다. 다른 부처의 국장급 인사 역시 "내가 지금 자리에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일을 벌였다가 뒤처리도 못하고 후임자에게 짐만 떠맡기는 꼴이 될 수도 있어 조심하는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부처의 허리 격인 국장급 간부들의 마음이 딴 곳에 있으니 그 밑의 과장·직원들은 새로 정책기안을 올리기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관에게 기안을 올려봐야 후임자로 상관이 바뀌면 이미 올린 기안들이 별 검토 없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하반기 국정의 청사진을 짜야 할 시기에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획재정부의 경우 거시와 미시를 아우르는 '하반기 경제정책운용 방안'을 다음달 말까지 마련해야 하고 내년도 예산안과 올해 세제개편안을 짜기 위한 구상작업에도 시동을 걸어야 하는 시기가 지금이다. 금융위원회는 당장의 현안인 금융사고 문제뿐 아니라 가계부채 문제 등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야 하고 산업통상자원부와 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등은 각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여부, 쌀 관세화 유예 문제, 유럽연합으로부터의 불법조업국 지정 여부 등 민감한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함께 보건복지부는 연금개혁, 고용노동부는 통상임금 문제 등 산업계 현안 등을 줄줄이 하반기에 풀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이 같은 난국을 돌파하려면 공무원들을 숨죽이게 하는 정무적인 불확실성을 선결해주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물론 선거야 일정이 정해져 있고 세월호 사태 역시 구조 등의 물리적 제약이 뒤따르니 어쩔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최소한 개각 파동에 따른 정무적 변수는 행정부의 수반이 교통정리를 빨리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개각 사정권에서 제외되는 각료 등에게는 대통령이 미리 언질을 줌으로써 흔들리지 말고 소신껏 평상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개각 대상에 있는 부처라면 시간을 끌지 말고 한꺼번에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미 현재의 자리에 마음이 떠난 장관들도 있을 터인데 굳이 오래 붙잡지 말고 빨리 후임자를 정해주는 것도 방법"이라며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해당 장관으로서도 하루 일하든 한 달을 일하든 별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라고 조언했다. /경제부·사회부 newsroo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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