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결자’ 허윤경 “우승 만든 건 ‘힐링여행’과 ‘멘털메일’”

우승 확정 뒤 인사하는 허윤경 /용인=권욱기자

김효주·백규정 누른

2m 파 퍼트를 놓쳤다면 허윤경(24·SBI저축은행)에게는 또다시 ‘비운의 골퍼’라는 꼬리표가 붙을 뻔했다. 28개 홀 연속 파 행진을 펼친 김효주(19·롯데)가 보기로 연장 첫 홀을 마친 상황. 두 번째 연장으로 가면 흐름이 넘어갈 게 뻔했다. ‘강심장’과 ‘새가슴’의 갈림길에서 허윤경의 퍼트는 일직선으로 홀을 찾아 들어갔다. 5개월 만의 우승이자 지난 2010년 데뷔 후 첫 한 시즌 2승. 지난주 대회에서 사흘 내내 단독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날 2타를 잃어 김효주에게 우승을 내줬던 허윤경은 1주일 만에 짜릿한 설욕에 성공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김효주, 백규정(19·CJ오쇼핑) 등 무서운 신예들의 태풍을 잠재운 ‘종결자’ 허윤경을 3일 인터뷰했다. 허윤경은 폭주하는 휴대전화 메신저 축하 글 가운데 “지난주의 비운을 행운으로 돌려놔 정말 기쁘다”는 내용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준우승 전문서 준비된 챔피언으로=허윤경은 한때 ‘준우승 전문’으로 불렸다. 2012시즌 준우승만 4차례였다. 3번째 샷이 아웃오브바운스(OB) 나는 등 생각지도 못한 불운이 우승을 막았다. 그러다 지난해 5월 60번째 대회 출전 만에 첫 우승이 찾아왔고 올 시즌 2승을 추가했다. 특히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은 2년 전 무릎 부상으로 기권했던 대회라 우승이 더욱 뜻깊다. 당시 상금순위 2위를 달리던 허윤경은 첫날 7번홀 뒤 통증을 호소하며 대회장을 빠져나갔고 결국 역전 상금왕 대신 상금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무릎은 여전히 아프다. 이번 대회에도 허윤경은 테이핑을 하고 경기했다. 올 시즌은 여름부터 허리 디스크도 앓고 있다. 그럼에도 허윤경은 아픈 몸보다 연장에서의 아픈 기억만 생각했단다. “연장에서 진 기억들이 되살아났어요. 프로 들어 4번 연장에 3번을 졌거든요.” 오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안 진다. 넘어서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지난해 매치플레이 대회 32강에서 4번째 연장 끝에 허윤경을 돌려보낸 게 바로 김효주였다. 데뷔 첫 승 때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허윤경은 이번 우승 뒤에는 준비된 승자처럼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허무감 끝에 찾아온 우승=이번 대회 프로암 이벤트에서 허윤경은 드라이버를 275야드까지 날렸다고 한다. 올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도 262야드가 넘는다. 전체 6위. 지난 시즌보다 최대 20야드가 늘었단다. “체격(171㎝)에 비해 거리가 안 난다는 말이 많았다”는 허윤경은 “겨울 동안 손목과 팔목 근력 운동을 많이 했더니 헤드 스피드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드라이버에 대한 자신감으로 골프는 쉬워졌지만 사실은 올 시즌이 데뷔 후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허윤경은 털어놓았다.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던 2년 전보다 더 힘들었단다. “10월이 고비였어요. 부상으로 몸은 힘든데 성적 욕심은 나고 조금만 가면 우승이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안 돼 더 지치더라고요. 사람들 눈에는 (투어 생활이) 화려하고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자기만의 시간도 없이 매주 경쟁을 반복하는 생활에 ‘왜 이렇게 사나’ 싶었단다. 이사이 체중도 1년 전보다 5㎏이나 빠졌다.

허윤경을 일으킨 것은 친구들과의 ‘힐링 여행’과 권성호 서울대 스포츠심리학 교수의 ‘멘털 메일’이었다. 지난주 대회 직후 허윤경은 대회장 근처에서 친구들과 1박2일을 보냈다. 일요일은 숙소에서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고 월요일은 곤지암리조트의 ‘화담숲’을 2시간 동안 걸었다. 근처 아웃렛에서 쇼핑도 했다. “자작나무숲을 걷고 억새도 만지면서 완전 ‘힐링’한 거죠.” 숲에다 잡념을 버리고 온 허윤경은 권 교수가 보낸 메일을 이번 대회를 앞두고 몇 번씩 읽으며 새 각오로 마음을 채웠단다. ‘네 스스로 벽을 만들고 그물을 치는 것 같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잘했을 때만 생각하고 경기한다면 조만간 우승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2쪽짜리 메일에 허윤경은 다시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권 교수는 10년째 허윤경의 심리 코치를 맡고 있다. 김종필 스윙코치와도 10년을 함께하고 있다. 허윤경은 지금의 자신을 만든 사람들을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골프는 내후년까지만=허윤경은 친구가 많다. 1·2라운드를 동반 플레이한 4년 후배 백규정에게 쇼트게임 능력과 장타가 부럽다고 선선히 말하고 우승 뒤 소감으로 “김효주라서 부담스러웠다”고 밝히는 걸 보면 그 이유를 알겠다. 이번 대회 공동 4위 박신영(20·대방건설)과도 절친하다. 박신영은 막판 1벌타를 받아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 퍼트 때 마크를 한 뒤라도 공이 움직이면 집어선 안 된다. 허윤경도 비슷한 상황에서 벌타를 받았던 경험이 있어 더욱 안타까웠다고 한다.

시즌 뒤 허윤경은 친구들과 크루즈 여행을 떠나기로 했단다. 다음 달 캄보디아와 베트남 등지를 배로 여행할 계획이다. 해외 진출에는 큰 욕심이 없다. 일본 진출 계획도 접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하겠다”던 목표는 지금도 그대로다. 2016년이면 우리 나이로 27세. 은퇴가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말에도 허윤경은 단호했다. “골프 선수들은 자기 인생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골프 외에 제2의 인생도 살아보고 싶어요. 대학원에 진학해 스포츠 심리 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결혼도 해야죠.”

‘순둥이’‘맏며느리감’이라는 별명도 모두 마음에 든다는 허윤경. 그는 ‘사람 참 괜찮다’‘배울 점이 많은 골퍼였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골프 선수니까 실력은 당연히 좋아야 하는 거고요. 인품도 좋다는 말을 들어야죠. 그러려면 제가 더 노력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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