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총선을 끝으로 25년 정치 인생을 명예롭게 마감하려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51) 스페인 총리의 노력이 마지막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추문으로 빛이 바랬다. 총선 패배는 차치하더라도 선거 승리를 위해 열차 테러범 은폐 등 온갖 부당한 처신을 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는 게 더 뼈아프다.일간 엘 페리오디코의 안토니오 프랑크 사장은 마드리드 열차 폭탄테러 직후 이슬람 과격세력이 연관된 증거들이 나왔음에도 아스나르 총리가 몇몇 언론사 경영진과 접촉해 바스크 분리독립 단체인`바스크 조국과 해방`(ETA)이 테러의 주범임을 강변했다고 16일 털어놓았다. 테러의 배후가 알 카에다 등 과격 이슬람 세력으로 드러날 경우 이라크 전쟁 동참에 적극 앞장 선 자신에게 국민의 비난일 쏠릴 것은 물론 선거에서도 불리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국영 EFE 통신사 기자들도 이날 “테러 직후부터 이슬람 테러조직과의 연계 가능성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보들이 입수됐지만 보도되지 않았다”며 정부와 회사측의 음모 공조 의혹을 제기했다.
사건 당일 스페인측 정보에 의지해 즉각 ETA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아스나르 총리에게 속았다”며 분개하고 있다. 스페인 출신인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연합(EU) 대외정책 담당 대표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총선 결과에 대해 “한 사회가 투명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매우 분명한 방법으로 대응한 표시”라며 완곡하게 아스나르 총리를 비난했다. 익명을 요구한 유엔 외교관은 “정치적 책략에 이용 당했다”고 말했다. 독일의 공영방송 ARD가 스페인 정보당국이 열차테러의 배후가 ETA라고 믿도록 유도하는 허위정보를 독일 당국에 제공했다고 보도한 것도 아스나르 총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총선 패배 후 아스나르 총리는 발언을 자제하고 있지만 사회당 정권이 출범한 뒤 진상조사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