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2월 31일] 소중한 열매를 맺은 한해

경제난에 대한 불안과 위기의식으로 시작했던 올 한해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도대체 IMF 때보다 더 어둡다는 이 금융위기의 여파가 어디까지 갈까 하는 불안을 잠재울 수 없었던 시작이었다. 그런 불안이 빠른 경제회복에 밀려 지난 한해와 함께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특히 연말에 날아든 사상 최대 규모라는 해외원전수주 소식은 '내년에는 우리 같은 문화계 종사자들에게도 좀 좋은 날이 올까' 하는 기대까지 갖게 한다. 그런 가운데 필자도 올해 긴 세월의 신념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만한 알찬 열매 하나를 맺을 수 있었다. 음악 열정 한시도 놓은적 없어 얼마 전 일이다. 그날도 다음 시즌 오페라 준비에 한창 땀을 흘리고 있는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대한민국오페라대상조직위원회(위원장 이긍희)의 통보였다. 전화 내용은 "귀하의 오페라단이 금상을 수상했으니 시상식에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 필자에게 떠오른 단어는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오페라를 올리면서 겪은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ㆍ갈등이 한꺼번에 씻은 듯이 사라지고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밀려왔다. 초심을 버리지 않고 어리석은 길을 꾸준히 걸어온 나의 믿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었던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예술가의 꿈과 정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초심을 필자에게 깨우쳐준 스승이 한분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이탈리아에 건너가 국립음악원과 시립음악원, 그리고 아카데미 등에서 수학하며 여러 스승을 만났다. 그때 이탈리아의 만프레도니아라는 도시에서 니콜라 칼라브레세라는 선생님을 만났는데 마침 우리나라가 IMF라는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였다. 고환율로 모든 경제가 어려웠지만 유학생의 처지는 참으로 암담했다. 당시에는 하루하루의 생활도 어려워 정말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조용히 필자를 불러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도움을 주며 말씀하셨다. "지금 현실에 지쳐서 음악인으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 그저 평범하게 들릴 수도 있었던 그 말에 필자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음악에 대한 정열과 사랑에 감동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불안했던 마음을 다잡고 다짐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가면 지금 느끼고 배운 것을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다 쏟으리라.'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 (vissi d'arte, vissi d'amore)'라는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그것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때 필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초심이었다. 귀국 후 한국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들을 보면서 '보다 아름답고 멋진 작품들도 많이 있는데 왜 귀에 익은 몇몇 작품만 공연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다. 내년에도 좋은 작품 선뵐터 그래서 지난 2004년 '새롭다'는 뜻의 누오바오페라단을 창단했다. "오페라는 책상에 꽂혀 있는 오랜 고전이 아니다. 매년 새롭고 참신한 오페라를 창작하고 소개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올해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호프만의 이야기"를 공연한 것이다. 그 때문에 예상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페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박수와 격려를 얻었다. 이번 오페라대상 시상식에서 누오바오페라단이 금상을 수상한 것은 이런 취지를 잘 펼쳐보라는 여러 선배 음악인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격려일 것이라고 믿는다. 올해는 조금 낯선 작품으로 시작했다. 내년에는 더욱 더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으로 관객 곁으로 다가서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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