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양적완화 축소에도 신흥국 경제가 아직 큰 충격을 받지 않고 있지만 내년 정치 리스크까지 겹칠 경우 대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양적완화 충격이 아직 미풍에 불과하지만 'P(정치) 공포' 때문에 순식간에 폭풍우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일 로이터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에 취약한 신흥시장 5개국이 모두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있다"며 "테이퍼링보다 (대규모 시위와 정정불안에 따른) 최루가스에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전했다. 내년에 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은 총선을, 브라질·터키는 대통령 선거를, 인도네시아는 양대 선거를 모두 실시한다. 아프리카의 경제대국 나이지리아도 2005년 초 대선을 실시한다.
현재 신흥국 금융시장은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에도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도의 경우 19일 뭄바이지수나 달러 대비 루피화 가치가 각각 0.73%, 0.18% 떨어지는 데 그쳤다. 지난 8월 금융위기 조짐을 보이자 달러 의존도를 낮춘데다 테이퍼링 충격이 시장에 어느 정도 반영됐기 때문이다. 리처드 제럼 뱅크오브싱가포르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인도·인도네시아 등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바리케이드를 쌓아놓은 탓에 6개월 전보다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내년 정치혼란 가능성이다. 티나 포트햄 씨티그룹 애널리스트는 "지지부진한 경기, 취약한 리더십, 중산층의 욕구 분출, 대중 의견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증가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민중의 소리 위험(Vox Populi risk)'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2010년 '아랍의 봄'에서 보듯 우발적인 사건 하나가 대혼란이나 정치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더구나 이 같은 정정불안이 연준의 출구전략 지속과 맞물리면서 테이퍼링 취약 5개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도 있다. 정치권이 포퓰리즘 정책을 펴면서 정부재정 악화, 임금상승에 따른 물가불안 등으로 가뜩이나 취약한 경기가 더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코왈치크 크레디아그리콜 이코노미스트는 "신흥국은 아직 출구전략의 직접적인 충격을 받지 않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미 국채금리가 오를수록 신흥국에서 외국인 자본 유출 리스크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FT는 "통화가치 하락과 외국인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기준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선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해외 투자가들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등이 반시장적인 정책을 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 세계은행(WB)은 정치 리스크 보험시장 규모가 올해 1,000억달러로 지난해보다 33% 늘어난 데 이어 내년에도 비슷한 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투자가들이 외국인 자산 몰수, 계약 재협상, 자본 유출입 통제 등에 대비해 너도나도 관련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는 셈이다.
반면 신흥국 정치 위기가 유혹적인 투자 기회라는 의견도 있다. 블랙록의 세르지오 트리고 파즈 신흥시장 수석은 "정치적 불안 때문에 다른 투자가들이 떠나면 헐값에 인수한다는 게 솔직한 우리의 전략"이라고 전했다.
알리아 무바예드 바클레이스 이코노미스트도 "선거가 오히려 시장 친화적인 개혁을 촉진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