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사태 살얼음판] 투자ㆍ증설 유보 저울질… 시나리오별 대응책 마련 부심

■ 재계, 브릭스 전략 긴급 점검
자동차업계 "가뜩이나 성장 부진한데 전망 불투명"
전자업계 "소비시장이자 생산기지… 위기 대비해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판매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되면서 임직원들에게 우크라이나 출장제한 조치를 내렸다. 삼성전자는 현재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시나리오별 안전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주재원과 가족들을 철수시킨다는 방침이다. LG전자도 우크라이나 주재원 가족들을 지난주 한국으로 귀국시켰으며 임직원들의 출장을 제한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사태의 파장이 확산되면서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기업들은 더 나아가 이번 사태가 러시아를 비롯한 신흥국 경제위기로 확산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신흥국에 대한 투자 및 사업전략을 다시 들여다보는 분위기다.

4일 KOTR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기업들은 현재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한국은 물론 모든 국가로부터의 수입이 2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에는 현재 국내 대기업이 직접 진출해 있지 않아 이번 사태가 우리 기업에 당장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서방과 러시아의 충돌로 이어지면서 러시아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점이다. 이에 당장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에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고압차단기 공장을 건설한 현대중공업은 당초 올해까지 증설을 고려했으나 러시아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러시아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투자 확대는 유동적인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4,000만달러를 투자해 4만㎡ 규모의 고압차단기 제조공장 '현대일렉트로시스템'을 준공했다. 현대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현지 경제 상황을 고려해 증설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만 전국경제인연합회 신흥시장팀장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틀어지며 주위로 리스크가 확대된다면 우리 기업의 러시아 등 동유럽 투자 마인드가 위축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사태를 비롯한 신흥국 위기는 모두 비경제적 요인이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들이 이들 시장에 진출할 때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정치 등 비경제적 요인을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러시아를 넘어 브릭스 등 신흥국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서방과의 갈등을 촉발한 러시아 경제가 충격을 받으면서 세계 신흥국 전반으로 타격이 확산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와 중국의 성장률 둔화 등도 신흥국 경제에 대한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다.

현대·기아차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브릭스 시장에 대한 긴급 점검에 들어간 것도 신흥국 경제위기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차원이다.

실제로 브릭스 국가들의 자동차 시장은 이미 성장 모멘텀이 약화됐다. 지난해 브릭스 국가의 자동차 수요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전년보다 줄어들었다. 인도에서는 자동차 판매가 전년 대비 7.3%나 줄며 15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러시아도 전년 대비 5.3% 감소했다.

브릭스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한계를 보임에 따라 올해 자동차 시장 전망도 불투명하다. 중국 자동차 판매는 지난해 14.4%의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7.7% 수준으로 뚝 떨어질 것으로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는 예상하고 있다. 브라질과 러시아도 소폭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이 같은 예상마저 빗나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 이어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세계 경제가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면서 "달러 유동성이 안전자산으로 급격히 몰릴 경우 브릭스 국가의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자업계도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신흥국의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동안 북미와 유럽 등 기존 선진시장과 더불어 성장을 이끌어왔던 브릭스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자칫 전자업계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브릭스 국가들의 성장세가 주춤한데다 최근 들어 정세 불안 등 위험요인들이 다시금 부각되면서 시장 상황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며 "소비시장은 물론 주요 생산기지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브릭스 시장의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경우 전자업계에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이에 전자업계는 신흥시장에 대한 모니터링 작업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 1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이상철 중남미 총괄 부사장 주재 아래 브라질·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13개국 법인장과 영업 책임자 등을 모두 소집해 '중남미 전략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 시장상황을 재점검하는 동시에 중남미 시장 공략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 방안 등이 논의됐다. LG전자도 브릭스 시장의 변화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책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어차피 신흥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신흥국은 어느 정도 위험을 내재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신흥국은 구조적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수출이나 투자를 결정할 때 철저한 리스크 대응과 모니터링, 위기상황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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