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러 방송매체에서 토론 프로그램의 종류도 많아졌고 그 시간도 상당 히 길어졌다.예고된 주제에 관심이 있어 상당한 기대를 갖고 토론을 지켜보지만 토론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단 토론이 많아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반증일 수 도 있으므로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토론의 끝에서는 왜 뭔가 부족하다는생각이 들고 아쉬움 속에서 돌아서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토론의 과정 이, 타협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감성적 대립으로 종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말꼬리 잡기식 방송토론
타협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긍정적ㆍ부정적 의미를 모두 갖는다. 극한 의 대립을 달리는 중에서 나온 타협이라면 긍정적일 것이요, 적당히 어떤일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면 부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많은 토론에서는 문맥상 의미는 중요 하지 않다. 단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약점을 잡기 위 한 소위 ‘말꼬리 잡기’가 만연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맥상 의미는 아무런 관심도 가질 수 없다.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혹시 상대방이 말실수 를 한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식의 토론으로는 아무런 발전적 타협을 이끌어낼 수 없으며, 상대방에게 감성의 상처를입히게 됨은 물론 자신은 더 큰 감성의 상처를 받을 뿐이다.
옛말에 ‘누구도 자기가 하는 말이 다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뜻하는 바를 모두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말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말의 특성을 모두들 이해하면 서도 정작 큰 흐름인 문맥은 개의치 않고 사소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공석에서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의도된 말실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말들이 문맥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된다면 이는 더 큰 오해와 갈등을 불러 일으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이러한 악습과 절연하기 위해서는 기준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는 판단의 기준이 감성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내 편이 아닌 상대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과 의심을 갖고 있는 한 어떠한 정반합도 이룰 수 없다. 따라서판단의 기준이 감성에서 원리와 원칙으로 전환돼야 한다.
원리ㆍ원칙에 비추어 상대의 장단점을 파악한 후 자신의 부족을 솔직히 인정하고 상대의 나음을 칭찬할 때 발전적 타협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4·15총선 후의 화두는 단연 ‘상생(相生)’이다. 이러한 상생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Back to the Basic’일 것이다.
혹자는 변화로 대변되는 21세기에 원리ㆍ원칙을 거론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반대로 스스로 원칙주의자라고 자평하는 이들도 있 다. 그러나 이 모두는 원리ㆍ 원칙의 가변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새겨 보아야 한다.
즉, 처한 상황에 따라 특정한 원리ㆍ원칙을 부정하거나 스스로 원리ㆍ원칙 을 생산하는 것은 아닌지 판단해야 한다. 원리ㆍ원칙이란 불변의 진리는 아닐지라도 쉽게 바뀌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타협으로 相生 모색해야
이러한 판단을 위한 가장 쉽고 빠른 방법,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방법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그 방법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일관된 기준에 따라 언행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다.
원리ㆍ원칙이란 필요할 때 가져다 쓰는 작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리ㆍ원 칙에 다가가야 하는 더 큰 것으로 이해할 때 상대가 가지고 있는 원리ㆍ원 칙에 대한 발전적 타협이 가능할 것이다.
날카로운 비판과 세련된 말솜씨로 한순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는 있 다. 그러나 이렇게 탁월한 수단들이 감성의 잣대에 의해 표출된다면 더 이 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냥 현재의 문제점만 끌어안은 채 앉아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앞을 향하여 한걸음이라도 떼기 위해서는 이미 드러난문제들을 원리ㆍ원칙에 따라 상대와 나눠야 한다.
때로는 이러한 방법이 상대의 짐을 덜어 자신의 짐에 얹는 결과를 낳을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는 좀더 힘겹더라도 기본의 걸음을 걸어나가야 한다. 이러한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결국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가슴 뛰며 기다릴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씩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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