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파워 미국이 세계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국가부채한도와 예산안 타협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세계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탓이다. 연방정부 폐쇄를 두고 국가 신뢰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의 파산이라고 비웃는다. 미국 재무부 금고는 이제 바닥을 드러내기 일보 직전이다. 이달 말 만기 도래하는 국채를 갚지 못할 처지다. 액면만 놓고 보자면 1997년 우리나라 재무부 금고에 달러가 거덜나 국가부도 직전에 몰렸던 상황과 진배없다.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국에서 달러부족으로 채무불이행(디폴트)위기에 처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것도 미국 중앙은행이 매달 850억달러를 찍어내 뿌려대는 데도 말이다. 달러 패권의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닌 게다.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는 벗어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번 고비를 넘긴다고 해서 위기는 끝이 아니다. 적어도 집권당이 상ㆍ하 양원을 모두 장악할 때까지 세계경제를 볼모 삼는 치킨게임은 매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리더십이 만신창이가 된 1차적 원인은 정치 타협 실패에 있지만 그 뿌리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있다.
미국의 나라살림이 거덜나는 데는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탄탄한 재정 흑자국이었다.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듬해 흑자재정이 무너지더니만 나라살림은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올해까지 12년 내리 적자다. 누적 적자 규모는 자그마치 8조달러.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6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사정이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명박 정부 5년간 나라살림은 적자였다. 장기 재정계획상 최소한 2017년까지 적자구조는 계속된다. 그나마 경제성장률 4% 전제하에 그렇다. 낙관적 시나리오대로라도 10년 누적 적자 규모는 200조원에 이른다. 이 바람에 국가부채도 덩달아 불어났다. 올해 480조원에서 내년엔 510조원으로 늘어나고 2017년엔 국가부채 600조원 시대에 돌입한다. 최근 5년간 국가부채 증가율은 경제성장률보다 2~3배 높았다. 앞으로 몇 년간 이런 추세는 계속된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가. 어지간한 성장으로는 빚도 갚지 못한다는 얘기다. 당장은 아니지만 국민이 장차 떠안아야 할 조세부담도 덩달아 늘어난다. 국채 이자 갚느라 올해만도 국민 1인당 40만원의 혈세를 쏟아 부어야 한다. 정부는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재정적자가 감소할 것이라지만 솔직히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장기재정계획을 엉터리로 짜고선 해마다 수정해서만은 아니다. 성장률 4%도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거니와 복지라는 새롭고도 거대한 지출 눈덩이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경사길 앞에 선 까닭이다.
135조원짜리 복지공약은 새해 예산안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 이젠 굴러가면서 뭉쳐질 일만 남았다. 내년엔 14조원 지출에 불과하지만 임기 마지막 해인 2017년엔 42조원으로 늘어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복지는 갈수록 더 많은 지출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유사한 지출수요까지 수반한다. 기초연금이 정부 수정안대로 실시되더라도 재정 부담은 2020년엔 17조원에서 2040년엔 99조원으로 불어난다. 3년 뒤 총선과 4년 뒤 대선이 끝나면 복지가 굴러갈 경사각도는 더욱 가팔라질 게다.
1990년 중반 세계화 열풍에 취한 우리는 4년 내리 경상수지 적자가 초래할 위기를 징후조차 감지 못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대가치곤 외환위기의 고통은 너무 컸다.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국민과의 대화에서 "금고가 비었다"고 털어놓고선 고통 분담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저성장과 복지 파티는 최악의 조합이다. 그것도 10년 내리 재정적자 속에서다.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다가올 재앙을 감지 못한 1990년대 말의 우를 지금 되풀이하는 것은 아닌지. 어찌해서 외환 위기를 겪고서도 다른 나라 재정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제는 외환(外患)이 아니라 내우(內憂)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