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3월2일, 러시아 국민들에게 고대하던 소식이 전해졌다. 차르(황제) 알렉산더2세가 농노해방령을 발표한 것. 1857년 3월 귀족회의에서 ‘밑에서 농민이 자신을 해방하는 때를 기다리기보다 위에서 농노제를 폐지하는 편이 좋다’는 뜻을 밝힌 지 만 4년 만이다.
농노들은 희망을 가졌다. 차르도 농노해방을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로 ‘유럽의 헌병’으로 불리며 강대국 대접을 받았지만 밖에서는 크림 전쟁에서 패하고 안으로는 체제불안에 시달리던 상황. 알렉산더2세는 귀족층의 반대에도 지방자치, 사법ㆍ교육ㆍ병역제도 일신, 의회(두마) 설치 등 개혁조치를 잇따라 내놓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인구의 70%를 차지하던 2,240만여명의 농노는 신분상의 자유를 얻었지만 막상 땅이 없었다. 지주들이 땅값을 올려버리는 통에 경작지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 농노가 ‘땅을 갖고 글을 배우는 데’ 분노해 농장을 폐쇄하는 지주도 생겨났다.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흩어졌다. 1863년 27대73이던 도농 인구비율은 1897년 53대47로 역전됐다. 신규 노동력의 유입 덕분에 산업화의 후발 주자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발전했지만 노동자들은 농노시절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만 받고 여러 가구의 남녀가 한방에서 밥 먹고 잠잤다.
억눌린 불만은 거세게 터져 알렉산더2세 암살-반동 전제정치 강화-불황-러일전쟁 패배-노동자 봉기-탄압-소비에트정권 수립으로 숨가쁘게 흘렀다. 신분의 속박을 깨뜨렸지만 경제적 욕구는 채워주지 못했던 불완전한 개혁이 사회주의 혁명의 씨앗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