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시민들이 지하철 피카딜리서클역 부근에서 ‘임대’ 광고판이 붙어 있는 한 상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이 상점은 지난해 겨울까지만 해도 의류를 팔았지만 불황으로 문을 닫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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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바뀌어 있었다.
비에 젖었던 텅빈 도로는 형형색색의 차들로 가득 찼고 냉기가 돌았던 상점과 거리는 사람들의 열기로 그렇지 않아도 더운 여름을 더욱 달구고 있었다. 집 앞에 걸려 있던 ‘팝니다(For Sale)’ 간판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히드로공항에서 내린 후 지하철로 1시간 가까이 달려 찾은 곳은 영국 최대의 번화가 ‘리전트 스트리트’. 지난해 겨울 이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상점들도 밖에서 볼 때 끊이지 않는 인파로 불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겉보기에 런던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허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리에서 건물 안으로 1m만 들어가도 아직 런던이 ‘리먼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 최고의 백화점으로 불리는 헤로드백화점은 구경을 하는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붐볐지만 정작 쇼핑백을 들고 나가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염치 불고하고 백화점을 나가는 런더너를 붙잡고 물어봤다. “뭐 사신 것 있나요.” 잠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바라보던 그는 “산 게 없다”며 투박하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물건을 살 만큼 돈이 많지 않다”며 귀찮다는 듯이 지나갔다.
주변에 널려 있는 명품 매장들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버버리ㆍ구치 등 명품 매장의 직원 중 일부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지쳤는지 자기들끼리 잡담하는 모습도 보였다. 폐점 후 새로 입주할 주인을 찾지 못한 일부 매장도 눈에 띄었다.
길을 건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 저가 의류매장 ‘H&M’을 발견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옷을 들고 줄을 서 있는 등 다른 상점과는 전혀 달랐다. ‘헤르메니’라는 이름의 직원은 “이전에 비해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판매가 늘어나는 것 같다”면서도 많이 늘었냐는 질문에는 “하지만 예전의 수준까지는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 7월 생산자물가지수(PPI)와 산업생산이 전월보다 각각 0.1%, 0.4% 상승하고 구매관리자지수(PMI)가 50을 넘는 등 지표는 호전됐다지만 그게 전부인가 싶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주택 경기가 피부에 와닿을 만큼 호전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해 11월 찾았던 런던 인근 주택가인 첼시 거리를 다시 가봤다. 그 때는 온통 ‘매물' 광고로 거리가 도배되다시피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간간이 ‘팔렸음(Sold)’을 알리는 푯말이 붙어 있을 ‘For Sale’ 간판은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주택 가격이 전월보다 1.3% 상승해 석달째 오름세를 보였다는 기사와 비슷한 흐름인 것 같았다.
주택 대출시장은 어떤지 알기 위해 영국의 주요 은행들이 몰려 있는 ‘뱅크(Bank)’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City)’로 갔다가 의외의 것을 발견했다. HSBC에서 ‘저금리 모기지론’을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기지론을 빌리라고 선전하는 광고문구를 또 만날 수 있었다. 은행들이 모기지 대출을 재개한 것이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도움으로 최근 은행에서 모기지를 대출 받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최근 집을 사면서 은행에서 약 15만파운드(약 3억원)를 대출한 리처드 헌터씨는 “지금 집값이 워낙 싸서 사게 된 것”이라며 “예전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금리도 괜찮고 은행에서도 곧잘 빌려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놓고 영국 경기가 조만간 괜찮아질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아직 무리라는 게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런던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한 관계자는 “휴가철과 방학을 맞아 관광객과 학생들이 몰려나온 거리 풍경만 보고 ‘런던이 되살아났구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면서 “현지 실구매자들이 지갑을 열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런던 거리를 걷는 동안 만난 소나기는 영국이 아직도 ‘경기침체’의 축축한 그늘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