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셔(John A. Fisher) 제독. 해군 근대화와 석유산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매출 세계 1ㆍ2위를 달리는 영국석유(BP)와 로열더치셸이 존속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피셔는 13살에 견습병으로 입대, 최고위직인 해군경으로 전역한 입지전적 인물. 46년간 근무하며 범선대열의 영국해군을 최신전함과 잠수함ㆍ항공모함을 갖춘 함대로 바꿨다. 현역 시절 못다한 것은 연료 전환. 공개실험시 석탄을 땔 때는 이상이 없던 전함의 연료를 석유로 바꾸자 검은 연기와 함께 정지하는 통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인은 버너 결함으로 밝혀졌지만 ‘질 좋고 풍부한 웨일즈산 석탄을 버리고 공급선이 해외인 석유로의 전환은 망국 행위’라는 석탄업계의 로비가 먹혔다. 귀족출신의 한 장성은 ‘흰 연기를 내뿜는 석탄연료 전함의 품위’를 내세웠다.
고민하던 예비역 제독 피셔에게 나타난 구세주는 해군장관에 막 취임한 윈스턴 처칠. 처칠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피셔는 ‘석유는 전함의 연료적재공간을 30% 줄이고 평균 시속을 4노트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며 의회를 설득했다.
마침 파산위기를 맞던 석유회사들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결국 모든 함정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한다는 결론이 났다. 국영화라는 단서 아래 ‘앵글로-페르시안’(BP의 전신)과 20년 장기계약이 맺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회사인 로열더치셸도 물량을 얻었다. 세계 최강 영국해군의 연료 전환은 나머지 나라들을 자극시켰다. 바다의 공기가 검은 연기로 덮였다.
1920년 7월10일, 피셔가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을 때 각국은 석유를 마음껏 퍼 썼다. 오늘날 세계는 거꾸로 고민 중이다. 고갈 위기의 석유 대신 석탄 활용을 늘리는 방안을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