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실정·부패 친서방 정권에 염증… CIS, 러시아에 러브콜

우크라이나 군사·경제적 이익 내세워 러와 관계 개선 박차
키르기스도 친러화 가속… 러선 '당근'으로 입김 강화 나서
中 영향력 확대·이슬람 갈등 변수속 수세몰린 美 대응도 주목



글로벌 경기 침체가 냉전시대 종식 이후 형성돼 온 동유럽ㆍ중앙아시아의 역학 구도까지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경제 위기의 주범인 유럽연합(EU)과 미국은 친서방 화를 이뤄냈던 구 소련 지역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서 영향력이 빠르게 감소하는 모습인 반면 러시아는 천연가스 등 자원을 무기로 이들 국가들에 대한 입김을 강화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CIS 국가들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태세다. 냉전시대와의 차이점이라면 '이념'보다는 '경제'가 변화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 CIS 국가 국민들의'친러' 성향 역시 친 서방 정권들의 장기간 실정과 무능ㆍ부패 및 경제 위기가 그 배경이다. 서구권은 이제 2000년대 장미혁명(그루지야)ㆍ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ㆍ튤립혁명(키르키스스탄)의 발발로 친서방화가 뿌리내린 이들 지역에서 잇달아 '역 혁명'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있는 모습에 긴장하고 있다. CIS의 중심국가인 우크라이나의 경우 지난 2월 대선에서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총리가 친서방파 율리아 티모셴코 현 총리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친러'화에 속도가 붙고 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지난 2004년 1차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부정 시비를 둘러싼 2차 투표 끝에 오렌지색 친 시위대를 이끈 티모셴코 측 빅토르 유센코 전 대통령에게 패한 바 있어 이 선거는 서구화를 촉발시킨 '오렌지 혁명'의 복수전으로 평가됐다. 이후 양국은 곧 '군사적 이득'과 '경제 이익'을 주고 받으며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영토에 주둔 중인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 기간을 25년 연장해 주기로 하고 현재 1,000㎥당 330달러를 주고 있는 가스 구입 비용을 100달러 가량 전격 인하한다는 데 합의했다. 양국은 오는 6월 7년 만에 합동 해상 군사훈련도 펼친다. 우크라이나는 한발 더 나아가 전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준비를 위해 만든 위원회를 폐쇄해 나토 동진(東進)에 대한 러시아의 우려를 덜어주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양국 간 가격 마찰 때문에 수시로 빚어졌던 유럽행 가스 중단 사태도 이제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가스 가격 조정으로 인해 한해 40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이다. 러시아는 핵발전소 협력을 댓가로 50~6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에 빌려줄 수 있다고 밝힌 상태. 우크라이나는 국제 금융위기와 주요 수출 품목인 철강 가격 하락 등으로 지난해 마이너스 15% 성장률을 보였으며 위기 초반에 이어 국제통화기금(IMF)에 재차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등 위기가 심각한 수준이어서 러시아의 '당근'에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달 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우크라이나 측에 자국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과 우크라이나 국영 나프토가즈의 합병을 제안하는 등 급격한'친러'화로 경제 예속을 더 깊게 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나프토가즈는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전략적 자산인 가스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이 기업의 가스관을 통해 유럽 가스 공급량의 1/4를 유럽 대륙에 공급해 왔다. 언론 자유 역시 위축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파리 소재 국경없는 기자단은 "새 대통령 선임 이래 언론자유가 제한되면서 취재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싼 가스 공급의 대가로 러시아와 일체화를 시도하는 것은 개혁 자체의 실패를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아시아의 빈국 키르키스스탄의 '튤립혁명'도 사실상 무위로 돌아간 상태다. 키르키스스탄은 인구가 530만명에 불과하지만 러시아와 미국의 군사 기지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지구상 유일의 국가다. 키르기스는 지정학적으로 중앙아시아 내로 이슬람 과격세력이 진출하는 통로가 되는데다 우즈베키스탄ㆍ카자흐스탄ㆍ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주요국들과 인접해 있다. 쿠르만벡 바키예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며 수도 비슈케크를 탈출했고 키르키스에는 이를 대신해 친러 성향의 로자 오툰바예바 과도정부가 세워졌다.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예프 러시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키르키스 사태가 지난 시민혁명에 근접해 있다"며 "제 2의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시민 지지로 정권을 잡았지만 지난 5년 간 무능과 부패로 민심을 잃어왔다. 특히 올 초에 공공요금을 대폭 올리고 증세안을 마련하면서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푸틴 러시아 총리는 과도정부가 들어선지 수 시간 만에 과도정부를 인정한 데 이어 5,000만 달러 이상의 원조를 약속하는 등 키르키스가 자국의 '뒷마당'임을 과시했다. 인접국의 지역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5년에도 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키르키스스탄 등 3국에 걸쳐 있는 페르가나 계곡에서 키르키스의 시민 혁명이 시작된 이래 우즈베키스탄 내에서도 사망자 500여명이 기록되는 반정부시위로 이어진 바 있다. 게다가 이곳은 아프가니스탄 등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연계돼 반정부 성향이 강한 곳이어서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주도하고 있는 인접국 중국 등의 관심도 높다. 그간 과격 이슬람 단체인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IMU)은 이 계곡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펴 왔다. 수세에 몰린 미국의 입장도 주목할 대목이다. 지난 달에만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 5만여 명이 키르키스 기지를 통해 아프간을 오갔다. 중국은 일단 관망세지만 미-러의 힘겨루기가 가속화될 경우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러시아는 이밖에 올초 벨라루스, 카자흐스탄과 재통합의 전 단계라 할 관세동맹을 발효시키며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70년 전 카틴숲 대학살 등 역사적으로 갈등을 겪어온 동유럽의 대표적인 친서방 국가인 폴란드와도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는 등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에 걸쳐 '과거의 영화'에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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