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민주당 앨 고어 후보에게 총 득표수에 뒤지고도 미국 43대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W. 부시.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물렁하다고 몰아붙였던 그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온건 외교정책을 180도 바꿔버렸다. 이를 미국 조야에선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으로 불렀다. 클린턴이 하던 것만 빼고는 무엇이든 괜찮다라는 의미다.
△부시 행정부의 첫번째 조치는 특사의 폐지. 상원의원 같은 거물 정치인을 통한 막후 중재와 협상은 클린턴의 전매 특허였다. 북한과의 제네바합의(1994년)를 이끌어냈던 협상이나 중동평화협정(1993년) 체결 과정에서 보여준 막후 물밑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등장한 게 일방주의 외교정책.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불량국가'를 굴복시킨다는 개념의 강경 노선은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표면화한다. 이듬해 연두교서 발표에서는 그 유명한 '악의 축'발언이 나왔다. 2003년 이라크침공은 일방통행식 안보정책의 끝판격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6개월이 막 지난 지금 관료사회에선 MB지우기가 한창이다. 4대강은 새 정부 들어 감사원으로부터 사실상 대 운하 사기극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환경부는 물 흐름을 막아 녹조 현상을 심화시켰다며 불과 2년 전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어디 이뿐이랴. 등 떠밀려 해외자원 개발에 나섰던 석유공사는 졸지에 나라살림을 축낸 좀벌레 같은 공기업으로 낙인 찍혀 버렸다. 산업은행에서 분리된 정책금융공사는 4년 만에 재통합될 처지다.
△관가 분위기는 가히 ABM(Anything But MB) 수준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의 표상이던 녹색은 요즘 입밖에 꺼낼 단어가 못 된다. 꼭 유지해야 할 직책은 아예 이름을 갈아치웠다. 녹색대사가 기후변화대사로 바뀐 게 대표적 사례다. 이러다간 5년 뒤 행복이라는 단어가 녹색꼴 짝 나지 않을까 모르겠다. 5년마다 반복되는 'AB증후군'. 정치보복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지만 정책보복은 여전한가 보다. 누군가 말한다. 그래서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만 손가락질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원죄는 정치에 있다. /권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