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정부는 왜 침묵하나”

세월은 콘크리트 다리에 빛바램을 남겼고, 그날은 총탄을 남겼다. 세월은 그날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 못했고 박힌 총탄도 뽑아내지 못했다. 1950년 7월 그 다리 아래서 수백명의 흰옷 입은 피란민들이 죽었다. 우방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미국의 군대에 의해서였다. `노근리 사건`이었다. 이슬비가 내렸고 사위는 을씨년스러웠다. 국토의 대동맥 경부선 철로를 떠받치는 다리위로 새마을호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장맛비로 불어난 황톳물은 쌍굴다리 밑을 흘렀다. ● 53년 전의 7월, 그 속절없는 죽음의 현장 3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이곳은 노근리 사건 현장입니다. This is NO GEUN-RI Incident Point.` 1999년 사건이 세계적 이슈가 된 뒤 영동군이 세운 수㎙ 너비 입간판이 덩그렇다. 다리 앞에서 전화를 건지 10여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달려왔다. 5~6㎞떨어진 임계리와 주곡리에서 포도 봉투를 싸던 농군들이었다. 노근리 사건 대책위 부위원장이기도 한 양해찬씨는 “요즘 포도 봉투 싸느라 정신이 없다”며 “그래도 사람들이 찾으면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온다”고 했다. 함께 온 정구호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그 해 7월 쌍굴다리 밑에 있었다. 서정갑씨는 초등학교 5학년, 양해찬씨는 3학년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들이 됐다. 53년 전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수고를 그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답사나온 대학생들 앞에서, 단체로 찾은 중고생들을 보며, 그리고 파란 눈을 굴리는 외국인들 앞에서 늘 하던 대로 였다. 콘크리트속 깊이 틀어박힌 미제 `탄두`를 보여주기 위해 까치발로 흰 페인트칠 삼각형 속을 가리켰다. 폭탄파편을 맞아 눈알이 대롱대롱 매달린 어린 누이의 모습, 총탄에 코 언저리가 모두 날아가 마신 물이 주르르 흘려내려도 피범벅 된 입술로 기어이 물을 삼키려들던 친구의 모습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시체 썩은 물로 갈증을 달래 가며 3일을 버텼다는 굴다리 안 그 자리에 철버덕 앉아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더기 스는 동네 어른들의 시신을 방패막이 삼아 땅바닥을 헤집어 숨어 들던 3박4일간의 공포가 53년의 세월을 건너 온전히 전달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뭐라도 될 듯 했는데, 오는 사람들마다 그러는데…아무 것도 된 게 없어.” “성에 차진 않지만 미국 대통령이 사과 성명까지 낸 사건이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됐고 외국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아직 추모비 하나 없잖아.” ● 한국정부의 외면속 피해자 생가슴 뜯어 주곡리를 거쳐 임계리로 들어섰다. 흰봉투를 주렁주렁 매단 포도나무가 빽빽했다. 그 때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은 `남쪽으로 피란시켜주겠다`는 미군들을 따라 보따리를 울러 매고 길을 나섰고 그들 상당수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임계리 초입엔 누런 흙을 개 지어올린 방 두칸짜리 토담집이 남아 있었다. 야생초와 들쥐가 주인 대신 앞마당을 차지했다. 이곳에 살던 다섯 식구는 그날 피란길을 나섰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주민 박순기(66)씨는 “식구가 한명도 돌아오지 못한 집이 여섯 집은 됐다”고 했다. 당시 사건에 어떻게든 관련됐던 사람들은 많이 떠났다고 했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이 된 사람은 호구책을 찾아 객지로 떠났고 어떤 이는 정신을 놓았고, 또 어떤 이는 죽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특히 한국정부에 맺힌 게 많아 보였다. “군사정권 때야 아무 소리도 못하지. 술김에 벙끗하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로 데려갔는데. 그땐 그때라지만 지금은 또 뭐야?” “우리는 양민이다. 왜 우리를 죽이나”를 절규하며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있을 때 한국의 군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신이 사건을 국제적으로 이슈화하고 미국이 진상조사에 이어 “가당찮은” 수습안을 내놓으며 법석을 떨 때도 “다시 한국 정부는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그게 아니다”며 생가슴을 뜯어야 했다. ● 노근리사건은 미에 대한 우리 자존심의 바로미터 4일 오전 영동군청에서 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80노구의 정은용 위원장이 대전에서 왔고 새벽같이 농사일을 끝낸 대책 위원 등 5,6명이 모였다. 15일 초ㆍ중ㆍ고생들을 대상으로 여는 `노근리 인권 백일장`과 26일 53주기 추모식 행사 준비를 위한 자리였다. 대책위는 최근 `노근리 인권평화연대`로 이름을 바꾸고 NGO로 등록했다. 노근리 사건을 인권과 평화 활동으로 승화하겠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사업비라도 도움 받자는 고육책도 담겨있다고 했다. 더 이상 피해자들의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만 활동을 꾸려가기엔 벅차보였다. 장려한 수사로 이뤄진 2001년 1월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의 사과 성명은 유족들로서는 사과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은 “미군이 가해자라는 한마디 언명도 없이, 노근리가 아니라 한국전쟁 와중에 숨진 모든 양민을 위로하는 추모비와 장학금 75만 달러를 수습대책이라고 내놓았다”고 한다. 노인들은 과감히 손을 내저었다. `인권과 정의의 국가` 미국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한국정부는 손을 놓았다. 위선에 가득한 미국은 오만했고 한국은 무기력했다. 노인들은 마지막으로 국회에 기대를 걸어본다며 `사건의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지난해 11월 청원했다. “배상ㆍ보상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미국이 못한다면 자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한 정부가 이제라도 나서 정확한 진상을 담아 추모비와 기념관을 세워 희생자들을 위로해 줘야 하지 않겠나”고 했다. 법안은 지난6월 국회 행자위에 제출돼 계류 중이지만 “국회의원들이 워낙 바쁘니 잘 될지 모르겠다”고 한 피해자는 말했다. 그리고 “정부의 무력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놓은 지난 3년이 침묵 속에 지낸 50년보다 더 허망하다”고도 했다. 노근리 인권평화연대 사무총장을 맡은 정구호씨는 “노근리가 해결됐다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이 효순이 사건도 없었다”고 했다. “청산하지 못하면 계속 무시 받을 수밖에 없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에 대한 우리의 자존심, 정체성의 바로미터”라고도 했다. 추모비는 당분간은 세워지기 힘들어보였다. 콘크리트 쌍굴다리가 당분간 그 역할을 대신할 터였다. <영동=이동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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