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실종·리더십 붕괴..혼돈의 17대 국회

새 정치에 대한 높은 기대를 안고 출범했던 17대국회가 첫 해 활동을 마감하면서 총체적 혼돈에 빠진 한국정치의 부끄러운 현주소를그대로 드러냈다. 17대 국회는 지난 7개월 동안의 의정활동을 통해 색깔 공방, 몸싸움, 본회의장의 욕설과 고성, 회의장 점거와 장기 농성, 당론 정치의 폐해 등 과거 국회가 보여줬던 모든 부정적 현상들을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재현해냈다. 재적 299석 가운데 3분의 2에 달하는 187석을 초선의원들로 채웠지만, 과연 새로운 인물들이 국회에 대거 입성한 게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대치 정국을 주도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서로 상대당을 `수구 꼴통', `좌파 빨갱이'로 비난하면서 저급하고도 해묵은 공방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오염시켰다. 17대 국회는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고 능률적인 국회'를 표방하며 출발했지만,그 성적표는 초라한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30일 현재 17대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 1천48건 가운데 가결이나 부결, 폐기 등어떤 식으로든 처리된 법안은 280건으로 26.7%에 그쳤다. 규제개혁특위, 일자리창출특위, 국회개혁특위, 정치개혁특위 등 8개 특위는 명패만 걸어놓은채 거의 활동하지 않으면서도 위원들은 매달 450만원에 달하는 활동비를 꼬박꼬박 챙겼다. 새해 예산안은 여야 대치로 인한 한나라당의 예산심의 장기 보이콧이라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31일 새벽 1시55분께 한나라당 위원들이 불참하고, 열린우리당과민주노동당, 민주당 위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예결특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회계연도 개시일을 하루 앞둔 12월31일에 예산이 통과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있는 늑장 처리 기록이다. 특히 국가보안법 등 쟁점법안 처리 문제를 둘러싼 여야의 대립과 갈등은 `정치의 실종'과 `리더십의 붕괴'라는 17대 국회의 특징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한나라당은 국회 법제사법위 회의장을 점거한채 국가보안법 폐지안의 상정을 원천 봉쇄하는 등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열린우리당은 틈만 나면 `강행처리'를 거론하면서 과반의석을 과신하는 사이에 `타협의 예술'이라는 정치는 온데 간데 없었다. 이번 연말 임시국회에서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가 `4인 대표회담'을 통해 쟁점법안의 일괄타결을 시도했다가 성과없이 종료됐다. 세밑인 30일과 31일 새벽에는 여야 원내대표간 합의가 각 당의 강경파 의원들에의해 차례로 번복됐고, 급기야 원내대표들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최종 합의문조차한나라당 의원들이 거부하면서 본회의장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여야 원내대표의 최종 합의를 이끌어낸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 합의문이 휴지조각이 돼버린 상황에 대해 "참 이렇게 정치인이 부끄러운 줄 몰라 가지고..."라며혀를 찼다. 여야 모두 `원내 중심 정당'을 표방하면서 원내대표의 형식적 위상을 당 대표에버금가도록 끌어올렸지만, 실제 리더십은 이전에 비해 현저히 약화됐고 원내대표의합의가 의원총회에서 뒤집히는 사례가 밥 먹듯 자주 일어났다. 물론 정당의 리더십 붕괴 현상은 1인 보스중심 정치체체의 종식에 따른 `당내민주화'의 긍정적 결과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소속 의원들을 당론의 굴레에 꼼짝없이 얽어매 자유로운 투표 행위를 가로막는 `당론정치'의 관행을 그대로 품고 있으면서도, 당내 소수 강경파가 다수의견에 따르지 않는 부조화가 더 큰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을유년 새해에 17대 국회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효율성을 입증하지 못한 여야의 어정쩡한 `투톱 시스템'에 대한 일대 개선과 함께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국정 전반에 대한 무한책임 의식 제고, 소수야당으로서 충분한의사표시를 하되 국회법의 절차를 지키는 한나라당의 태도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게 중론이다. (서울=연합뉴스) 맹찬형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