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시중은행 프라이빗 뱅커(PB)인 나경민(가명) 팀장. 요즘 그는 부쩍 타행의 PB가 작성한 투자 제안서를 들이미는 고객 때문에 진땀을 빼는 일이 잦다. 국내 부유층 1인이 평균 거래하는 금융회사는 2.7곳. 투자 결정시 거래은행 2~3곳의 PB에게 제안서를 각각 받아본 뒤 이를 비교 분석해달라고 의뢰하는 고객이 크게 늘었다. 과거처럼 주거래은행의 PB에게 모든 자산운용을 일임하는 부유층들은 드물다. PB 의견은 '참고'만 할 뿐 최종 결정은 스스로 내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부유층들의 투자 패턴이 바뀌고 있다. 정보 습득 채널이 다변화하면서 부유층의 PB 활용방식도 변하고 있다. 특히 최근 PB들의 수익률 전망이 크게 어긋나는 상황이 속출하면서 '부유층이 더 이상 PB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자조 섞인 얘기가 흘러나온다.
25일 금융계에 따르면 최근 부유층의 가장 큰 투자패턴 변화는 '부유층 스스로가 정보수집에 나섰다'는 점이다. 시중은행의 한 PB는 "부유층이 더 이상 집이나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PB가 제공하는 투자 정보에만 귀 기울이지 않는다"며 "2~3명씩 그룹을 지어 각자의 PB가 제공하는 투자정보를 공유하고 투자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패밀리 오피스'도 암암리에 운영되고 있다. 초우량 자산가 개인이나 또는 2~3명의 자산가들이 모여 금융사 퇴직 직원을 고용, 패밀리 오피스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기존 금융사 PB들이 한꺼번에 수십명의 자산을 관리하는 데 반해 패밀리 오피스에서는 고용주만을 위한 투자 정보 수집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간혹 금융사의 자산운용 수익률보다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A시중은행의 PB는 "개인적으로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수백억원의 자산을 운영하고 있는 한 고객은 지난해 패밀리 오피스 직원에게 10억원 플러스 알파의 보수를 지급했다고 말해 내심 놀랐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PB센터를 이용하는 부유층의 경우 투자 성향은 더 치밀해지고 꼼꼼해졌다.
PB에게 단순히 개별 상품 추천을 요구하는 데서 벗어나 전체적인 투자포트폴리오와 조화, 자산배분 비율, 투자 원칙 등 종합 분석을 요구한다. 시중은행의 한 PB는 "수천만원을 투자해도 제안서를 여러 장 요구하는 고객들이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투자 패턴 변화에는 PB들의 저조한 수익률이 영향을 미쳤다. 경기침체 및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되며 PB들의 예측이 엇나가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금(金) 테크'다. 올 초 대부분 PB들은 금투자를 권유했다. 하지만 최근 금값은 1돈당 20만원까지 떨어졌다. 연초(25만원) 대비 수익률이 20%나 쪼그라든 셈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골드뱅킹을 운용하는 PB들이 전략적으로 비과세 이슈를 마케팅에 활용, 금 판매에 열을 올렸다"며 "PB들이 고객 수익률 대신 해당 금융회사의 수익을 먼저 고려해 고객에 접근한다면 PB들에 대한 신뢰도는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