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클릭] 도청당한 국가원수


미ㆍ중 수교 30주년을 5개월가량 앞둔 2001년 9월. 시험비행 중이던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전용기에서 이상한 신호음이 포착됐다. 이 잡듯이 수색작업이 진행됐고 결국 화장실과 장 주석의 기내 침대 머리 밑 등에서 20여개의 도청장치가 발견됐다. 하지만 제조사인 보잉사와 미국 정부 모두가 관련성을 부인하고 물증도 없는 상황. 장 주석을 격노케 한 이 사건은 결국 "미-중 관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모호한 방향으로 마무리됐다.

△현대 스파이전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지는 게 도청이다. 때론 상대국 기밀정보를 빼내기 위해 때론 약점을 잡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진행된다. 일국의 최고통수권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1995년엔 미국국가안보국(NSA)이 미국을 방문한 외국 국가원수의 숙소 내 대화를 도청해 백악관에 제공한 것이 들통났다.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기간 중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를 포함한 100여명의 그리스 주요인사가 무더기 도청을 당해 충격을 안겨줬다.

△한국 대통령도 마찬가지. 1970년대 후반을 뒤흔들었던 미국의 청와대 도청설이 그것. 1976년 워싱턴포스트의 코리아게이트 보도 과정에서 잠깐 언급됐던 이 사실은 1년 뒤 뉴욕타임스가 다시 제기하기 전까지 소리 없이 넘어갔다. 왜 그랬을까.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리처드 스나이더가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 정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공식 부인해달라고 요청했다.'국가원수에 대한 도청에 항의는커녕 '제발 감춰달라'고 사정했으니 코미디도 이만한 게 없지 싶다.

△전세계 35개국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NSA의 도청 의혹에 국제사회가 들끓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21개국은 도청을 규탄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유엔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고 우리 정부도 미국에 한국 대통령의 포함 여부에 대한 확인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미국 정치권에선 "정보기관의 정보수집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또는 "사과할 일이 아니다"라는 소리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자신들도 엄연히 불법으로 규정한 도청이 당연하다니….궤변도 이 정도면 세계정상급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