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2월 17일] 강호순과 도서관

허형식(위즈덤하우스 팀장)

본인이 저지른 범행을 책으로 출판해 자식들이 인세라도 받게 하고 싶다는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돌발 발언이 애꿎은 출판계에 불똥으로 튀었다. 논객들은 한탕주의를 노리는 출판계의 풍토 때문에 범죄자까지 출판에 기웃거린다며 불화살을 출판계로 돌리고 있다. 범죄자의 정도를 벗어난 발언에 혀를 차면서도 문득 정말 그의 책을 출간하겠다고 달려드는 출판사가 나타나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의 발언 밑바탕에는 자신의 범죄 행각을 다룬 엽기적인 책이라도 출간을 강행해 돈을 벌고자 하는 출판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아닌가. 돈이 되는 책이라면 짜깁기, 중복 출판에 자극적인 제목도 불사하며 책들을 쏟아내던 출판계의 쏠림현상에 출판인의 한 사람으로서 눈살을 찌푸렸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출판사들의 이와 같은 파행을 단순히 상업주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곤란하다. 책도 하나의 상품이고 모든 상품은 소비자에게 팔리기 위해 존재하기에 베스트셀러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생존본능인 것이다. 누군들 팔리는 책보다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강호순이 모르는 출판의 현실은 이렇다. 과반수의 책들이 초판(대략 2,000부~3,000부 내외)의 절반도 판매되지 않고 보름 정도 지나 반품으로 돌아온다. 소위 책의 무덤이 된다. 지난 2008년 출판계의 판매부수는 전년에 비해 평균 30% 정도 급감했고 서울시민 36%가량은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상황에 몰리면 그 어떤 출판사도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하나 만든 뒤 정말 만들고 싶었던 책 10권을 출간하면 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이런 답답한 악순환을 끊을 묘안이 없는 건 아니다. 600여개의 공공도서관과 1만여개의 학교 도서관이 바로 그것이다. 1만600여개의 도서관 중 20%인 2,120개의 도서관에서 미국처럼 정가의 2.5배에 해당하는 도서(Library Edition)를 구매한다면 출판사로서는 안정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안정적인 보상책이며 다시 양질의 도서에 대한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 생존본능 때문에 어쩌다 범죄자의 책에 침을 흘릴 일도 사라지는 것이다. 얼마나 행복한 상상인가. 지난해 8월에 발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도서관발전종합계획’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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