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협상 타결車·휴대폰 '즉시 무관세' 관철 실리챙겨
막판에 불거진 금융시장 개방문제 등으로 벼랑 끝으로 몰렸던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마침내 타결됐다.
국회비준을 거쳐 FTA가 공식 발효되면 남미시장에 수출전략 거점이 마련되고 관세철폐로 주력 공산품 수출경쟁력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포도 등 칠레산 농산물이 유입으로 농가의 직ㆍ간접적 피해가 우려됨에 따라 관세철폐 유예기간 동안 농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한ㆍ칠레 FTA는 우리나라가 체결한 최초의 FTA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협상진행 과정에서 나타난 협상력 부재, 부처간 불협화음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 한일, 한ㆍ멕시코 등 다른 FTA 협상도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일부에서는 냉장고ㆍ세탁기 등 핵심품목이 개방 대상에서 아예 빠져 '반쪽자리 FTA'라며 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적지않다. 또 국회비준을 앞두고 다양한 이해집단, 특히 농민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 최초의 FTA
FTA 외톨이 신세였던 우리나라도 지역이기주의로 대표되는 블록화 추세에 합류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양국간 교역규모를 볼 때 한ㆍ칠레 FTA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은 그리 크지 않다.
그보다는 미래의 이득을 노려볼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둬야 할 듯싶다. 앞으로 FTA를 맺어야 할 미국ㆍ중국ㆍ일본에 앞서 충격이 덜한 칠레와의 경험을 학습효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교역규모가 큰 나라일수록 이익집단의 반응이 예민해져 FTA를 맺기가 힘들다"며 "한 ㆍ칠레 FTA의 성공 여부는 얼마만큼 시범 케이스로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 금융시장 개방 걸림돌 제거
FTA 체결의 마지막 걸림돌로 작용했던 금융시장 개방문제는 일단 금융시장 개방 자체는 FTA에 담지 않되 4년 뒤 다시 논의하는 수준에서 타결됐다.
정부가 금융시장 개방문제에 대해 타협한 것은 이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면 한국이 FTA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부담이 크게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3년을 끌어온 협상이 막판 돌출변수로 깨진다면 명분도 실리도 얻지 못한다는 여론이 정부를 압박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연내 타결에 집착한 나머지 정부가 구속력이 약한 '4년 뒤 재논의'로 후퇴함에 따라 칠레 금융시장 개방을 4년 뒤 관철시킬지가 미지수다.
▶ FTA,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이번 FTA 협상 타결로 우리측은 결코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농산품의 양허안에서 우리측은 사과와 배ㆍ쌀 등 3대 품목을 관세철폐 예외 대상으로 인정받았고 다른 농산물도 5~16년간 유예기간을 둬 당장 농업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반면 우리의 수출 1ㆍ2위 품목인 자동차와 휴대폰의 경우 '즉시 무관세' 조건을 관철시켜 실리를 챙긴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사과와 배ㆍ쌀을 양보받는 대가로 세탁기와 냉장고를 무관세대상에서 예외로 인정함으로써 앞으로 유럽과 미국 등 경쟁국에 비해서는 수출경쟁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칠레는 공산품에 대해 7%(내년에는 6%)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수산물 분야에서 즉시 개방일정을 제시한 칠레측을 설득해 무관세화 목표 연도를 최대 10년으로 늦추기로 한 것과 예상하지 못한 피해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 농산물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양자 세이프가드 규정을 둔 점도 성과로 평가된다.
이 같은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무늬만 FTA'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우리측 주력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세탁기와 냉장고, 칠레측 주력품목인 사과와 배는 아예 관세철폐 대상에서 제외됐고 일부 공산품과 농산품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무관세화함으로써 자유무역의 의의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 앞으로의 과제
FTA 미아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한국이 첫 FTA를 체결함에 따라 현재 논의단계에 머물고 있는 한일, 한ㆍ멕시코, 한ㆍ싱가포르 FTA 전략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질서의 대세인 자유무역의 물꼬를 트고 중남미 수출시장에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금융시장 개방문제로 막판 결렬위기까지 치달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줄곧 드러났던 통상교섭능력 부재를 다시 한번 드러내 앞으로 추진할 본격적인 FTA협상이 순탄하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협상의 난맥상이 드러난 만큼 통상조직 개편론이 차기 정권에서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권구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