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이념의 씨줄 감성의 날줄로 엮은 '시대의 상징'

반전 문구 새긴 '히피문화' 사회 전면으로 첫 등장
영원한 패션 아이템… 개성표현·기업문화 상징도







티셔츠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 티셔츠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기본 패션 아이템이다. 알파벳 T자 모양의 반팔 상의를 뜻하는 티셔츠는 본래 군인 속옷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890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해군 군함 방문을 앞둔 함장은 해군 선원들의 민소매 작업복이 고민스러워졌다. 혹시라도 여왕이 선원들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불쾌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 함장은 선원들에게 짧은 반팔 소매를 민소매 속옷에 꿰매 입도록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것이 티셔츠의 시초로 전해진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군인들은 무더운 여름철에 겉옷 대신 T자 형태의 반팔 속옷을 즐겨 입었고 티셔츠는 자연스레 군인들의 여름철 상의가 됐다. 1951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오늘날 티셔츠가 대중의 일상복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불씨가 됐다. 주연배우인 할리우드의 섹스심볼 말론 브란도가 입고 나온 흰색 티셔츠는 그의 근육질 몸매와 조화를 이루며 당시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 등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스타들도 티셔츠 패션에 동참하면서 티셔츠는 젊음과 멋을 상징하는 필수 패션이 됐다. 오렌 세월 우리 피부와 가장 친숙하게 맞대온 티셔츠는 이제 패션의 영역에만 안주하길 거부한다. 티셔츠의 여백 위에 자신이 알리고 싶은 내용을 담아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티셔츠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새기면서 동시대의 이슈를 담는 담론의 장 역할까지 해낸다. 티셔츠에 멋진 예술작품이 등장하기도 해 혹자는 티셔츠를 '입는 캔버스', '걸어다니는 갤러리'라고도 부른다. 신수연 서울여대 의류학과 교수는 "티셔츠는 제조 원가가 낮은데다 다양한 문양과 문구 등을 그려넣을 수 있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홍보나 교육적 수단으로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적극적인 의사표현의 메신저=1960~1970년대 기성 사회에 반기를 든 '히피' 문화가 등장하면서 티셔츠는 정치적인 색깔을 입게 된다. 'No War', 'Peace' 등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를 외치는 문구는 그 시절 미국 젊은이들의 티셔츠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시대 변화에 따라 핵무기 반대, 에이즈 퇴치 같은 새로운 문구가 자리를 대신했다.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은 티셔츠의 위치를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피켓으로 '격상'시킨 '슬로건 티셔츠의 원조'로 불렸다. 1984년 마가릿 대처 총리에게 영국 최고의 디자이너상을 받을 때 햄넷은 정장 대신 직접 만든 롱티셔츠 한 장을 입고 나타나 화제를 모았다. 티셔츠에는 '58% Don't want pershing(58%의 국민은 핵탄두 미사일을 원하지 않는다)'이라는 슬로건이 씌어 있었다. 정치적인 이슈를 유머스럽게 티셔츠로 표현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도 한 장의 티셔츠가 화제를 모았다. 1960~70년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의 평소 스타일을 패러디해 오바마 대통령이 인민복에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디자인된 일명 '오바마오(Oba Mao)' 티셔츠가 주인공이다. 티셔츠 앞면 아래에는 마오쩌둥의 정치 슬로건인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爲人民服務)'는 글귀가 씌어 있다. 오바마오 티셔츠는 출시되자마자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에서 불티나게 팔리다가 돌연 자취를 감춰버렸다. 중국 정부가 이 티셔츠로 인해 자칫 오바마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해질지 모른다는 노파심으로 판매를 전면 중단시켰기 때문. 미국 CNN의 한 특파원은 상하이의 한 상점에서 오바마오 티셔츠를 사려다가 제지하던 경비원들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2시간 동안 감금됐다 풀려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티셔츠는 최근들어 디자이너들의 기부 아이템으로 각광받으면서 소비자들에게 '착한 소비'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는 최근 토미힐피거, 도나카란, 베라왕 등 유명업체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아이티 구호자금 마련을 위한 반팔 티셔츠를 제작 판매했다. 흰색 바탕에 '아이티에 사랑을(To Haiti With Love)' '아이티를 위한 희망을, 도움을, 치유를(Hope Help Heal Haiti)'이란 문구가 들어간 이 셔츠는 한 장당 25달러에 팔렸다. 협회는 지난 2001년에도 9ㆍ11 테러 피해 복구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조기 프린트를 하트 모양으로 표현한 티셔츠를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2년 월드컵이 티셔츠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당시 'Be the Reds'라는 문구가 새겨진 '붉은 악마 티셔츠'는 무려 2,000만장 가까이 팔리며 온 국민을 하나로 이어주는 '국민 교복' 역할을 했다. 그후 젊은층을 중심으로 갖가지 개성 넘치는 문구를 담은 이른바 '메시지 티셔츠'들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당당히 알리는 '오늘생일', 최신유행어 '빵꾸똥꾸' 같은 재미난 문구에서부터 최근의 사회적 이슈를 담은 티셔츠까지 봇물을 이룬다. 지난해 독도 영유권 문제가 벌어지자 온라인몰 옥션에서는 '독도사랑 티셔츠'가 1주일간 1,000여장 넘게 팔렸으며 광우병 파동 때는 '먹지않아 티셔츠'가 등장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안 의사의 얼굴, 손바닥과 함께 '아 동포들이여'라는 글귀가 씌어진 '안중근 티셔츠'가 바람몰이에 나섰다. 일부 단체는 빨강색의 이 티셔츠를 6월 남아공 월드컵 응원복으로 착용할 계획이다. 홍 숙 옥션 패션팀장은 "최근 젊은이들에게 티셔츠는 단순한 옷이 아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며 "개성을 나타내는 메시지뿐 아니라 독도문제나 안중근 의사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티셔츠들도 인기"라고 설명했다. ◇기업에선 조직 문화 웅변= 상장을 앞두고 있는 삼성생명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문화를 위해 근무복장 규제를 완화, 4월부터 청바지와 운동화를 제외한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으로 출근하도록 허용했다. 이수창 삼성생명 사장은 "투자자들이 눈에 보이는 경영실적보다 유연한 조직문화를 갖춘 성장성 높은 기업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며 "복장 자율화는 조직 문화를 바꾸려는 작은 시작"이라고 말했다. 잘 다려진 흰색 와이셔츠와 넥타이, 말쑥한 정장으로 대표되던 '은행원 패션'도 몇 년전부터 불기 시작한 '쿨비즈' 열풍에 힘입어 여름철엔 티셔츠 패션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금융 1번지 서울 여의도는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넥타이 부대'들이 사라지는 대신 시원한 반팔 차림의 '티셔츠 부대'들이 점령한다. 신한은행은 지난 2007년 하늘색 티셔츠, 2008년에는 겨자색과 옥색 두 가지 색상의 반팔 티셔츠 근무복을 전 직원들에게 지급했다. 뒤이어 국민은행과 우리은행도 2008년부터 티셔츠 근무복을 입기 시작했다. 올여름부터는 솔로몬, 에이스 등 35개 저축은행들도 스포츠 의류업체와 공동구매 계약을 맺고 오는 6월부터 반팔 티셔츠를 입을 예정이다. 정장 대신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갈아입은 은행 직원들은 대체적으로 만족해하는 분위기다. 은행원 유정근(35) 씨는 "티셔츠는 세탁이 편리하고 다림질도 필요 없는데다 활동이 자유로와 업무 능률도 덩달아 높아지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특히 은행장에서부터 임원, 말단사원에 이르기까지 전 직원이 모두 똑 같은 차림의 반소매 티셔츠를 입다 보니 조직 구성원간의 친밀도까지 높아진다는 긍정적 해석도 있다. 대한항공이 지난 2008년 새로 출범시킨 저가 항공사 진에어(Jin Air)도 승무원 유니폼으로 티셔츠와 청바지라는 파격적인 복장을 채택해 화제를 모았다. 유니폼의 대명사였던 승무원 복장을 차별화한 이유에 대해 진에어측은 청바지와 티셔츠는 자유와 실용을 상징하며 간편하고 캐주얼한 유니폼은 승객과의 거리감을 줄이고 친근하게 다가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패션 아이템으로도 꾸준히 진화= 옷장을 열면 누구나 여러벌 갖고 있는 티셔츠는 특별한 디자인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간편한 옷차림이지만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 가능한 멋스러운 아이템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경우 티셔츠의 모양이나 라인에 따라 귀여워지기도 하고 섹시해지기도 한다. 가격도 다른 패션 아이템에 비해 비싸지 않은 편이다. 티셔츠에 면바지만 입어도 '엣지' 있는 스타일은 모든 사람들의 패션 로망이다. 티셔츠가 패션 아이템으로 새롭게 조명받으면서 유통업계에서도 티셔츠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지난해 전세계적인 경기불황으로 티셔츠가 큰 폭의 매출신장을 기록한 덕분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여성캐주얼 부문 총 매출에서 티셔츠 비중이 지난 2008년 36.8%에서 2009년 41%로 높아졌다. 온라인쇼핑몰 G마켓에서도 전체 의류 판매 중 티셔츠의 비중이 2007년 17%에서 2008년 20%로 상승했다.손문국 신세계백화점 여성캐주얼팀장은 "티셔츠는 입기 편하면서도 디자인이나 색상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어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패션을 연출하려는 고객들에게 인기"라며 "이에 맞춰 브랜드별로 다양한 가격과 디자인의 티셔츠를 선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