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감자칩'을 향한 TV의 도전

김진석 CJ헬로비전 대표


회사에선 활기차고 샤프한 대한민국의 '김 과장'들이 집에 돌아오면 자기 옷 하나 세탁기에 벗어놓지 못하는 게으름뱅이가 된다. 그런 김 과장이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주말 저녁 TV 앞에서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실없이 웃는다. 피곤한 현대인들이 TV를 대하는 보편적인 자세는 대체로 이렇다. TV 앞에서는 무장해제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하루 종일 똑같은 집중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는 없다. 직장과 사회생활에서 각성된 상태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던 사람들이 TV 앞에서 수동적인 자세로 심리적 휴식을 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TV가 바보상자가 아니라, TV 앞에서 사람은 스스로 바보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최근 첨단 정보기술(IT)과 지나치게 복잡한 뉴미디어 문화에 대해 불편함과 거부감을 호소하는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19세기 초 기계문명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며 첨단기술의 수용을 거부했던 기계파괴운동 같은 극단적 양상은 아니지만, 과도한 기술에 대한 사회적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향은 방송과 TV산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새로운 산업환경의 도래로 방송 서비스의 복잡도가 크게 증가했고 날마다 새로운 서비스가 밀물처럼 쏟아진다.

수년 전부터는 스마트폰에서 넘어온 '스마트TV'가 미디어 분야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제조사의 스마트TV는 전 세계적으로 많이 판매되며 소비자를 사로잡았지만 실제 사용자들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고가의 스마트TV를 구입한 사용자들은 전통적인 TV 시청 이외의 다른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마트TV를 구입한 사람 중에 기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용자가 50%를 넘고 70% 이상은 스마트TV가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TV는 '스마트'해지고 있지만 소파에 기대다 못해 누워버린 시청자들은 시큰둥해한다. 소파에서 감자칩을 먹으며 TV 프로그램을 즐기는 그들은 과도한 이성적 몰입을 요구하는 스마트TV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한마디로 세상살이 복잡한데 TV까지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첨단 스마트기술도 TV를 대하는 사람의 심리 앞에서 무력해지고 말았다. 초기 스마트TV의 실패를 통해 얻은 미디어업계의 해답은 '단순함'이었다.

올해 CJ헬로비전과 케이블TV 사업자들은 새로운 스마트 셋톱박스를 선보였다. 사용자들이 스마트 기능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쉬운 스마트' 개념을 적용했다. 스마트 셋톱박스가 사용자의 방송 사용습관을 분석해 콘텐츠를 추천하면 사용자가 리모컨으로 선택만 하도록 했다. 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케이블TV가 제공하는 스마트 셋톱박스는 값비싼 스마트TV를 구입하지 않아도 보통 TV를 스마트TV로 만들 수 있어 보급의 용이성도 크다.

기술은 문화를 이길 수 없다. 케이블방송은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TV를 보는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스마트 케이블방송으로 진화할 것이다. 물론 그 이상의 서비스를 원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사용자를 위해서 '적극적인 스마트 서비스'의 문도 열어둘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