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자산 채권 마저 팔아치워… 한국서 돈 빼 일본으로

5일새 주식 1조 넘게 팔아 비중 축소 움직임 잇따라 증시 당분간 반등 힘들듯
뱅가드 매물부담 줄어드는 6월 되면 수급호전 가능성

추경호(오른쪽) 기획재정부 1차관이 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 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김동호기자



"북한의 군사적 도발 위협 수위가 전례 없이 고조되면서 대북 리스크를 전면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미리 이머징채권 펀드에서 한국물 비중을 조금씩 줄이고 있습니다."(외국계 A자산운용 홍콩 법인 주식운용본부장)

"엔화 약세에 북한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한국 시장 매력도가 떨어진 게 사실입니다. 싱가포르ㆍ홍콩법인에서 운용하는 아시아 지역 펀드를 중심으로 벤치마크 대비 한국물 비중을 줄이는 리밸런싱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외국계 B자산운용 싱가포르 법인 펀드 매니저)

외국인들은 그동안 북한 리스크에 대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해외 기관투자가들은 북한의 국지적 도발이나 핵ㆍ미사일 실험 위협이 있더라도 단기 악재로 보고 차분히 대응해왔다. 이번에는 다르게 접근하는 분위기다. 북한 리스크가 어느 정도일지 전면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북한 리스크를 이유로 한국물 비중을 낮추고 있다. 북한 리스크에 더해 일본 증시 급등에 따른 한국물 매력 감소, 상장사들의 실적 감소 등 구조적 요인까지 겹쳐 외국인의 셀코리아는 좀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북한 리스크가 본격화된 3월 이후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총 4조2,789억원을 팔아치웠다. 특히 5일에는 6,722억원을 순매도하며 매도 규모가 갈수록 가팔라지고 있다. 2011년 9월14일(6,873억원) 이후 일별 기준으로 최대 매도량이다.

보통 주식과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시장도 비슷하다는 점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3월 국내 채권시장에서 한 달간 4조4,729억원을 순매수한 외국인은 4월 들어서는 6,550억원 순매도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달에는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에 매매차익을 노린 외국인들이 국고채를 적극 바구니에 담았지만 4월 들어서는 북한 리스크가 고조되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손절매까지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해외 기관투자가들이 포트폴리오에서 한국물 비중을 축소하고 있는 것은 북한 리스크가 예전과 달리 그 강도가 훨씬 세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감행해도 '일회성 이벤트'에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북한이 연일 대미(對美) 공세 수위를 높이는데다 중국마저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가 전례 없이 고조되고 있다.

A자산운용 관계자는 "최근 북한으로 인한 지정학적 이슈가 점차 커지고 있으나 극단적인 상황은 가정하지 않고 있다"며 "다만 중국의 중재자 역할이 모호해지면서 예전과 달리 위험상황이 길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돼 선제적 차원에서 한국물 비중을 축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노믹스'에 따른 일본의 돈 풀기 정책으로 엔화가치가 연일 곤두박질치면서 일본 시장 투자 매력도가 급격히 커진 점도 한국물이 소외 받는 이유다. 김상철 슈로더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엔화 약세가 지속되자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호기를 놓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외국인 투자가들이 일본 주식시장으로 몰리고 있다"며 "특히 일부 헤지펀드들은 한국물을 파는 대신 일본물을 사들이는 롱쇼트전략을 구사해 국내 증시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동종 업종이지만 엔화 약세로 경쟁력이 커진 도요타나 혼다를 매수(롱)하고 현대차나 기아차를 파는(쇼트) 식이다.

상장사들의 올해 1ㆍ4분기 실적 전망치가 감소하고 있는 점도 외국인의 구매 욕구를 떨어뜨리는 요소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증시에 상장된 주요 기업 127곳(실적 추정기관 3곳 이상인 상장사, 삼성전자 제외)의 올해 1ㆍ4분기 전체 영업이익은 21조8,563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22조4,670억원)보다 4.7%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B자산운용 관계자는"한국 주요 상장사들은 일본에서 기계나 부품을 수입해 가공한 뒤 중국으로 수출한다"며 "최근 중국 업체들의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철강ㆍ기계 업종의 영업이익이 감소해 외국 기관투자가들의 투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북한 리스크를 중심으로 복합적인 요인들이 한꺼번에 작용하면서 당분간 국내 금융시장이 반등의 모멘텀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북한 리스크가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다 일본의 공격적 통화 정책으로 한국물에 대한 투자심리가 개선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글로벌 상장지수펀드(ETF)운용사 뱅가드의 매물 부담이 줄어드는 올해 6월이 돼서야 저가 매수심리가 살아나 수급이 호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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