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는 의중의 인물을 낙점한다. 낙점 이전에 각하의 이너서클은 마땅한 후보자를 물색한다. 그렇다고 널리 인재를 구하는 그런 식은 아니다. 우선 '우리편'인가를 확인한다. 그리고 모양새를 본다. 모양새를 본다는 것은 언론과 국민의 입에 후보가 오르내릴 때 '그럴듯한' 것이면 된다. 국가 경영 능력이야 대통령 한 사람이면 족하다. 대통령 보다 뛰어나서도 안되고 뛰어날 수도 없고 뛰어난 적이 없는 그런 인물이 이 나라 총리의 면면들이었다. 물론 국회의 인준과정이라는 형식을 통해 총리의 자격이 다시 한번 검증절차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도 그 본질은 정치적 통과 의례이거나 아니면 정파간의 권력 장악을 위한 공방의 무대일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매우 중요한 공직의 우두머리에 앉을 인물을 만들어 내는 생산양식이 이렇다는 말이다. 물론 총리를 역임한 인물 가운데는 훌륭한 덕목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왜 자꾸만 작아지는' 자리가 바로 총리직이다. 그야말로 거품만 크게 일어나는 '권력도 아닌 것이 크기만 큰..' 그런 자리란 생각이 든다. 두 차례검증 청문회는 각하와 여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 정도면 정치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진 그런 차원이 아니라 사회진화의 단서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대단한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사회 지도적 인물들을 배출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도입이다. 비단 총리뿐 아니라 부처의 장관, 나아가 조직의 장과 기업체의 대표에까지 이 제도가 확산될 경우 이것은 국가 사회 차원의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사회 기류에는 '반동의 바람'이란 것이 있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즐기는 정치적 사디즘(Sadism; 加虐性도착증)이 강해지면 대중은 엄청난 반발을 일으킨다. 자동조절 기능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이 민주주의의 진수 인지도 모른다. 투명성은 이미 정치 사회성을 넘어 경제의 요체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 월가에서도 여의도 주식시장에서도 개별 주식의 가치를 좌우하는 게 바로 투명성이다. 통신혁명과 인터넷의 보급은 은밀했던 개인의 파일들을 속속들이 공개하고 있다. 끼리끼리 보아주고 눈감고 은폐하던 아날로그 시대의 생산양식은 이젠 통할 수도 없는 그런 세상에 들어와 있다. '청문회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다. 손광식(언론인)
document.write(ad_script1); ▲Top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