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피는 봄날, 스물아홉의 매월당 김시습이 전남 남원을 지나간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세상을 등진 유랑길. 하지만 5층과 2층 전각, 8톤 구리 불상을 자랑했던 만복사를 못 지나쳤을테다. 하지만 연등을 밝히고 복을 비는 젊은 남녀들에 문득 쓸쓸해진 김시습은 이때 '만복사저포기'의 소설을 쓰며 마음을 달랜다.
소설은 총각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내기에 이겨 아름다운 여인과 인연을 맺지만, 사실 귀신인 그녀를 새로 태어나게 도와주고 그는 평생 홀로 살았다는 얘기다. 매월당은 '봄바람 건듯 부니 사랑도 지나갔네. 베갯머리 눈물 자국 몇 군데나 젖었던고 산비도 무심하여 배꽃만 떨어져 뜰에 가득차게 하네'라고 읊는다.
조계종 포교사이자 불교미술 강사 등으로 활동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전국 25곳의 사찰과 암자, 그리고 옛 절터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곳에 담긴 역사나 인물, 불교 교리에 대한 얘기도 섞이지만, 반드시 그것만도 아니다.
25개 이야기는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고, 사랑, 고독, 길(道) 세 가지의 주제로 묶어 놓았지만 굳이 정해놓은 독자도 없다. 역시 도(道) 부분이 가장 어렵지만, 띄엄띄엄 읽어도 저자의 의도에서 크게 멀지 않을 것 같다. 고적한 산사에 앉은 듯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만 느껴도 좋을 일이다. 특히 거의 매 페이지 수록된 김시훈 작가의 일러스트도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한결 가볍게 해준다. 1만8,500원. @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