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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1월22일 오전9시, 장기간의 신축공사를 마친 조선저축은행 인천지점이 본정 4정목에 개업했다. 인천미두취인소를 중심으로 기존의 조선상업은행 및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조선저축은행의 금융 4각 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날 은행의 개점 소식보다 더 비중 있게 신문을 장식한 기사는 통장개설 1호에 관한 것이었다. 새벽부터 개점을 기다려 제일 먼저 통장을 개설하고 예금을 한 사람은 지역 유지나 갑부가 아닌 인천 부도유곽(유흥가)의 기생이었다. '상반루'에서 일하는 일본인 향정다희(向井多喜)는 인천 화류계에서도 인기가 최고였던 예기(藝妓)였다. 어린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와 큰돈을 모았다.
1930년대 초반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전조선이 불황에 허덕일 때도 경성의 신정유곽이나 군산의 산수유곽 등 전국의 고급요정이나 유곽만큼은 돈이 넘쳤다. 주위에 증권취인소나 미두취인소가 있었기 때문. 주식투자를 하며 스트레스가 쌓인 조선의 젊은이들은 밤에 고급요정이나 선술집 등에 모여 술로 시름을 달랬다. 미두꾼과 정미업자들도 밤에는 유곽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거나 투자계획을 논하기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찌라시'의 첫 장면도 룸살롱에서 정보회의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증권시장과 화류계(花柳界)에 관한 기사는 유난히 많다. 1930년대 주식과 미두로 쌍벽을 이루던 동아증권 조준호와 금익증권 강익하의 야간 사무실이 경성의 명월관이나 조선관이었을 정도였다니 당시 증권가에서 차지하는 고급 요정이나 유곽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1932년 1월19일의 '평양 금고털이 사건'에도 미두와 유곽이 등장한다. 평양 진정유곽에서 송가(松家)라는 요정을 운영하던 좌나전심길(佐奈田甚吉)은 기미취차점(期米取次店·유사 미두중매점)도 운영하고 있었다. 큰 빚에 허덕이던 그는 기생 출신의 부인 등 8명과 함께 1년을 준비한 끝에 해머드릴 등을 이용해 발권은행인 조선은행 평양지점의 금고 벽을 뚫고 78만원이라는 거액을 털었다. 일본과 만주 등을 포함해 가장 큰 규모의 이 금고털이 사건은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으나 원한을 품었던 한 기생의 밀고로 일망타진됐다.
미두와 기생에 관한 미담도 많이 전해진다. 3·1운동 등으로 미두가격이 폭등한 직후인 1920년 보통학교도 못 나온 사환 출신의 반복창은 400원의 밑천으로 미두에 뛰어들었다. 미두 성공으로 1년 만에 100만원의 거금을 벌어들인 그는 조선 최고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호탕한 성격의 미두왕 반복창은 일본인 창기 8명의 전차금(前借金)을 대신 내고 환속(還俗)시켜줘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조선인 기생 중에서도 어렵게 모은 쌈짓돈을 독립 군자금으로 내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해준 사례가 많다.
증권시장과 화류계, 100년 전 일제 강점기에도 불가분의 관계였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3년 넘게 지지부진한 현재의 증시, 여의도 증권가에 활기가 돌기를 투자가들이나 증권맨들만 바라고 있는 게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