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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교통정리 필요한데 정부, 노사 입법요구 외면
관련 소송 1년새 3.5배나
소급분 판결도 들쭉날쭉 "정부가 갈등 부채질한 셈"
지난 1월 정부는 '통상임금 노사지도지침'을 발표했다. 지난해 말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바탕으로 △퇴직자에게 상여금을 일할지급하지 않는 경우 △일정 근무 일수를 채워야만 상여금을 주는 경우 모두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기준을 제시했다.
정부는 법원 판결과 지도지침을 가이드라인 삼아 개별 노사가 건전한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통상임금 논란이 기형적인 임금체계의 개편으로 이어지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과정에서 명확한 교통정리를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는 재계와 노동계의 요구는 뒷전으로 밀렸다.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노와 사의 한복판에서 중재를 꺼린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은 결국 '식을 줄 모르는 통상임금 논란'이라는 부메랑이 돼 날아왔다.
◇고정성 판단 법원마다 '제각각'=혼란이 커지는 첫 번째 원인은 고정성 여부에 대한 법원의 오락가락하는 판결 때문이다.
10월 부산지법은 르노삼성 근로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이 회사의 정기상여금은 퇴직자에게 지급되지 않음에도 통상임금으로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르노삼성의 상여금은 '결근' 등의 사유(무단결근, 직무 외 상병 결근, 휴직, 복직)로 일을 하지 못한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무 일수에 따라 일할계산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고정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재직자에게만 주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다'라는 정부 지침을 철석같이 믿었던 사측은 곧바로 항소했다. 이에 노조 역시 명절수당과 선물비, 개인연금 지원금, 관리자 활동 유지비 등도 통상임금에 넣어달라며 맞불 항소로 대응해 갈 길 바쁜 르노삼성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앞으로 2·3심이 상여금의 고정성 여부에 대해 1심과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릴 경우 통상임금 소송에서 '재직자 요건'은 더 이상 무의미한 조건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법원 판결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지 않으니까 명절수당 등도 소송을 통해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근로자들이 장기적으로 '내 일자리'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마음으로 노사합의를 통한 원만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노사관계의 바로미터나 마찬가지인 현대차 역시 이르면 다음달 선고를 앞두고 있어 산업계 전체가 긴장 모드에 돌입했다.
현대차의 경우도 근로자마다 상여금 지급 조건이 다르고 '상여금 시행 세칙'에 대한 노사의 해석도 달라 법원 판단에 노사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 상황이다. 이 소송에서 사측이 패할 경우 첫해 부담은 현대차만 5조원, 그룹 전체로는 13조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가중되면서 관련 소송 건수도 작년 대비 3.5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신의칙' 판결도 혼란 가중='3년치 소급분 지급 의무'에 대한 법원의 엇갈리는 판결은 더 큰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판결에서 "과거 노사합의로 통상임금에서 상여금을 제외한 부분까지 소급분 명목으로 뒤늦게 지급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반하며 기업에도 경영상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의칙' '경영상 어려움' 등 구체적 기준이 모호한 표현 때문에 다툼의 여지가 크다는 당시의 우려는 실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올 들어 법원은 아시아나항공과 르노삼성,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안정센터와 광주도시철도공사 등의 소송에서는 "통상임금 범위 확대로 경영상 중대한 위기를 맞는다고 볼 수 없다" "공공기관은 신의칙을 보다 엄격히 적용 받아야 한다" 등의 이유로 3년치 소급분을 근로자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반면 한국GM과 순천의 철강재 포장 회사인 누벨의 근로자들은 상여금이 통상임금 요건을 갖췄다는 판결을 받았음에도 소급분까지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김동욱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본부장은 "아시아나항공과 한국GM 등은 같은 대기업인데도 소급분 판결이 다르게 나오면서 '소송으로 해결하자'는 분위기가 한층 짙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재계·노동계 "정부가 주도권 상실" 반발=통상임금 발(發) 혼란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재계와 노동계의 반발도 점점 커지고 있다. 소극적인 대응으로 중재의 역할을 법원에 떠넘긴 정부가 오늘의 갈등을 자초했다는 것이 노사의 공통된 비판이다.
이들은 현재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우며 입법을 통해 다툼을 해결해줄 것을 정부·국회에 요구하고 있다.
박성식 민주노총 대변인은 "상여금과 수당 등 모든 소정근로의 대가를 통상임금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을 입법으로 명문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경총을 비롯한 재계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 이전의 관행대로 지급 간격이 1개월을 넘어서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서 제외해 기업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