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특허괴물 기술한국이 흔들린다] <4>특허펀드로 '기술한국' 지키자

토종 방어 펀드 만들어 '특허괴물' 대항마로 키워야
특허 사들여 분쟁 불씨 제거 기업은 제조·판매에 전념케
"숨어있는 아이디어 사업화" 인큐베스트 특허펀드도 필요


지난 3월 어느 금요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리츠칼튼호텔에서 경매가 열렸다. 각종 미술품과 골동품이 경매에 부쳐졌다. 그러나 이날 최고가 낙찰은 미술품이 아닌 특허가 차지했다. 특허로 큰돈을 벌겠다는 발명가와 펀드, 사업 아이템을 찾거나 특허괴물을 피하고 싶은 기업들이 이 경매에 참가했다. 이동식 메모리카드와 연관된 특허의 낙찰가격은 30만달러, 낙찰자는 RPX라는 특허방어회사였다. 이 회사는 회원들의 회비를 받아 특허를 매입했고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 목적으로만 사용할 계획이다. '소송은 안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특허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 특허괴물의 횡포에 맞서 특허방어회사가 생겨나고 제조업체들끼리 손잡는 특허연합(AST)도 나타나고 있다. 특허소송에 대한 위험이 갈수록 증폭돼 자사를 보호할 방어막을 찾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우리 정부도 특허펀드의 필요성을 인식해 7월 말 창의자본(인벤션캐피털) 5,000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이 펀드는 내후년 이후에나 시작되고 단계적으로 집행될 예정이어서 실질적인 효과는 4~5년 뒤에나 기대할 수 있다. 초 단위로 기술이 발전해가는 상황에서 4~5년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펀드 조성을 앞당기고 민간에서도 특허펀드가 생겨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형 특허펀드로 방어막 쳐야=특허방어회사 RPX의 회원은 삼성ㆍLG와 IBMㆍ필립스ㆍ시스코 등 14개 글로벌 업체다. 지난해 3월 RPX가 출범하면서 "회원들의 특허소송을 막아주겠다"고 밝혔을 때만 해도 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RPX가 특허괴물인 아카시아리서치로부터 디지털 디스크 관련 특허를 구매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RPX가 구매한 특허는 아카시아가 삼성ㆍLGㆍ파나소닉ㆍ필립스 등 18개의 굵직한 기업과 소송을 진행하고 있던 특허였다. 특허가 RPX로 넘어가자 삼성 등은 아카시아와의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허펀드가 특허소송의 위험에서 기업들을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폴 란 아카시아 대표는 "장기간 소송을 진행하면 더 큰돈을 벌 수도 있었다"며 "그러나 일부 주주들이 당장의 수익실현을 원하고 가격이 적정하다면 특허를 안 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해외 기업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 한국도 RPX 같은 토종 특허방어펀드가 절실한 상황이다. 특허펀드를 통해 기업들이 제조와 판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필요한 특허를 싼값에 매입해 라이선싱을 해주고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특허를 매입해 분쟁의 불씨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인큐베스트 펀드, 기술한국 초석 닦는다=특허펀드는 기술한국의 씨앗을 싹 틔우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명가들은 "한국에는 특허를 평가해 투자나 대출해주는 곳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업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평가해 창업 초기단계 기업을 지원하는 엔젤투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땅속에 묻힌 기술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게 하기 위해서는 '인큐베스트(IncuVest Incubation+Invest)' 특허펀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아이디어로 강력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때까지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특허 전문가는 "특허펀드를 만들면 특허ㆍ아이디어 거래가 활성화되고 기술가치 평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도 마련될 수 있다"며 "빛을 못 보거나 헐값에 해외로 팔려나가는 기술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기반조성, 펀드 운용은 민간에=전문가들은 "특허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특허펀드 조성은 한시가 급하다"며 "그러나 특허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발명자 간 네트워크가 없는 상황에서 특허펀드만으로는 강력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는 기본 인프라 구축에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부가 특허펀드 조성은 적극 추진하되 운용은 민간에 맡겨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닉 깁슨 인텔렉추얼벤처스 PR 이사는 IAM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부가 운영하는 펀드가 아이디어를 사서 특허를 출원한다면 특허청은 다른 것에 앞서 심사하고 다른 평가잣대를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며 "특허펀드의 효율적 운영은 전문인력이 관건으로 한국 정부가 초기단계부터 민간 전문회사에 아웃소싱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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