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오는 가을 비 덕분에 산에 가려던 약속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듯 예기치 않게 ‘마야 특별전’을 만났다. 한때 중남미를 지배했던 마야문명을 접하는 것은 마치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을 보는 듯 흥분되는 일이었다. 마야의 달력에 의하면 2012년은 제5 시대의 마지막 해이고 내년은 무려 5125년의 제6 시대가 시작하는 역사적인 첫 해란다. 우연의 일치일까. 세계경제의 양대 축을 이루는 미국의 대통령이 재선됐으며 중국도 새로운 시진핑 시대가 막을 열었으니 세계사에 중요한 해인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도 올해는 무척 중요한 해이다. 선진국 문턱을 오르내리는 대한민국을 선진국 대열에 정착시키고 통일을 향한 큰 초석을 놓을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해다. 그런데 그 대통령 선거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선거 과정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참담한 기분이다. 국가의 미래와 나라 경영을 두고 정책을 논해야 할 시간에 누구를 대표선수로 내세울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를 하며 또 방송과 신문은 이것을 톱 뉴스거리로 다루고 있다. 이런 삼류 ‘노이즈 마케팅’방식이 통하는 게 우리 국민의 수준이고 정치현실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서글프다. 그래 후보 준비가 안 된 쪽은 그렇다 치고 지난 5년 동안 준비한 사람은 어떤가. 그 긴 세월 동안 무엇을 준비했나. 적어도 지금쯤이면 대한민국이 나아갈 선진국가, 남북이 함께할 통일국가에 대한 청사진 하나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5,000만 국민의 지도자요, 세계 14위 규모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가 되려는 후보들이다. 대기업을 제물 삼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갈라놓고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의 갈등을 이용하고 바닥이 훤히 보이는 국가재정을 담보로 표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
미국 갤럽의 지난 2011년 조사에 의하면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으로 1위는 로널드 레이건(19%), 2위는 링컨(14%), 3위는 클린턴(13%)이고 4위는 케네디(11%)다. 이들의 공통점은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준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2차 석유위기로 세계경제와 미국경제가 파국으로 내몰리던 시기에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을 외치며 미국민의 피와 땀을 요구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에 무언가를 바라지 말고 국가에 무엇을 해줄 것을 생각하라고 다그쳤다. 즉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당당하게 국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땀을 흘리자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거판은 어떠한가. 상대방 눈치 보며 발표하는 정책을 보면 국가의 장래에 대한 비전도 국정운영의 방향에 자신도 없어 보인다. 아니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표가 걱정이 돼 표현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한 표라도 덜 잃는 정책, 한 표라도 더 얻을 정책으로 일관하다 보니 자신이 추구하던 경제적 가치관이나 정치적 소신은 어디가고 발표하는 정책은 차이가 없다.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섰으면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미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850년대 분단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주세페 마치니는 “이탈리아 청년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에게 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 못 자는 밤의 행군과 굶주림과, 고통과 그리고 피 흘리는 전장의 쓰라린 날들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조국의 영광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고 외쳤다. 지도자 마치니에게 좀 잘 먹고 좀 더 잘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관심은 ‘로마의 영광’, 즉 이탈리아가 세계에서 지도력을 회복하고 위대한 국가가 되는 데 있었다. 대통령 선거일이 30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가슴 벅찬 꿈을 제시하며 다시 한번 허리띠 졸라매자고 외치는 한국의 마치니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