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수렴 없이 처리할 일 아니었다"(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지시에 따른 것이다."(외교통상부 고위 당국자)
'한일 정보보호협정'자체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최고의 권력 심장부'로 여겨지는 청와대에 외교부가 사실상 직접적인 공격을 날린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청와대의 책임이 확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 수준이 '공직 기강의 와해'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신호다.
청와대 인적 구성은 크게 대통령 측근 출신과 각 부처에서 선발된 이른바 에이스 관료 출신으로 구성된다. 임기 초기에는 대통령 측근들이 업무를 주도하지만 점차 부처 출신들의 영향력이 커지더라도 청와대의 행정 부서에 대한 영향력과 우월적 지위는 임기 말까지 유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같은 우월적 지위가 한일협정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에서 깨졌다. 이쯤 되면 야당 의원으로서도 정도를 넘은 레임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임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를 넘어섰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북한에 못지않은 민감성을 지닌 일본과의 사실상 '최초의 안보 협정'을 비밀스럽게 추진할 수 있다는 판단은 이 정부의 정무적 판단력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정치 경험이 적은 대통령이기에 정무 기능의 보강이 더욱 필요했음에도, 이 정부는 이른바 '여의도 혐오증'으로 오히려 청와대의 정무 기능을 약화시킨 탓이다. 정무적 판단력이 취약한 행정부에 대해 청와대 해당 수석실에서 걸러내지 못하면 곧바로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다.
레임덕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특히 대통령의 통치력에 직접 영향 받는 국민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 대통령은 이번 일을 빨리 추스르고 와해된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 길은 꼼수나 미봉이 아니라 정도에서 찾아야 한다. 어디서부터 누가 잘못했는지 시비를 분명히 가리고 대국민 사과도 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자주 사과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잘못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중요한 문제가 한가지 더 있다. 행정 각 부를 통할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 총리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얼마나 견제하고 제동 거는 책임을 다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더욱이 대통령 말이 액면 그대로라면 '대통령에게 보고도 안 된 사안'을 대통령을 대신해 국무회의 의장으로서 조용히 방망이를 친 책임보다 큰 것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