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출연연구기관(출연연) 평가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연구원들에게도 큰 과제를 잡아서 수십년이 걸리더라도 평생 한 가지 연구에만 매진하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경엽(57·사진) 한국전기연구원장은 최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강조하며 "그간 단기 성과에 얽매이느라 국가 연구개발(R&D)이 투자 대비 효율이 떨어졌는데 수십년이 걸리는 과제라도 국가와 인류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밀어주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분기·반기·연도마다 계속되는 기관과 연구원 개개인 평가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것은 신임 출연연 수장으로서는 당찬 각오였다.
그는 "정부의 단기 평가 때마다 평생 D를 받는 한이 있어도 규모가 큰 프로젝트 하나에 평생 매진해 성과를 내면 그게 더 세상에 이익이라고 늘 설득한다"며 "평가 때문에 불안해하는 연구원들도 많은데 원장으로서 책임지고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힘줘 말했다.
지난달 17일 취임한 박 원장은 전기연의 리더를 맡은 지 이제 고작 한 달 남짓 됐다. 그러나 그는 지난 1981년 전기연에 입사해 벌써 34년째 전기연에만 몸담으면서 현 출연연의 문제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최근 대토론회까지 갖는 등 국가 R&D의 효율성에 대해 정부의 고민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박 원장은 '배추밭은 자주 갈면 안 된다'는 지역 속담으로 해답 제시를 대신했다. 정부가 몇 달이 멀다 하고 성과를 확인하려 하기보다 한 번 투자했으면 과감하게 자율성을 보장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또 과제와 과제 수행자 선정 방식만 제대로 잡아도 R&D 성과가 확연히 커질 수 있다고 단언했다.
박 원장은 "정부가 R&D 기관에 대해 너무 세세하게 관리·통제하려 하기보다 평가 체계를 더 굵직하게 바꾸고 행정 절차도 획기적으로 간소화해야 한다"며 "R&D 수행기관도 연구원 스스로가 하고 싶은 과제, 민간에서 이미 다 하고 있는 수월한 과제는 내려놓고 정말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큰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현재 전기연이 수행하는 연구 과제로 스마트 보청기, 광 이용 내시경 등을 소개했다. 현재 의료기기 시장은 외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두 세대 정도 멀리 보고 더 나은 국산 제품으로 대체하는 게 목표라는 설명이다.
또 지난달 전력계통운영시스템(EMS)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 것도 주요 성과로 제시했다. 그는 "차세대 EMS 개발의 경우 하드웨어 중심이었던 전력 분야 연구개발을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전환했다는 데 의미가 있고, 동남아시아·중동·남미·러시아 등에 수출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며 "풍력발전단지 운영제어시스템은 세계 선진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한 국산 기술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