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폐간" 위협에 서울경제 포기

"신군부, 언론사대표 소환 통폐합 각서 강제로 받아"
적법한 절차 무시하고 재산 환수·기부채납등 일삼아
지방지 통폐합은 형식적인 결재 조차 받지않고 시행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1980년 11월12일 신군부에 의해 ‘언론계 구조개선’이라는 명목하에 신문ㆍ방송ㆍ통신사 등 언론기관이 통폐합되고 언론인이 대량 해직됐다고 확인했다. 진실화해위는 결정요지문에서 조사 결과 국가(신군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헌법상 보장된 언론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이 침해당했음이 규명됐다고 밝혔다. 또 신군부는 권력 장악에 필수적인 언론통제를 위해 언론인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을 계획하고 저항적이거나 비판적인 언론인을 해직조치했다. 아울러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하고 이어 1980년 11월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했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언론사 통폐합은 신군부의 정치적 고려에 따라 대상 언론사가 선정됐고 ▦신군부는 자신들의 방침을 거부할 경우 국가기관을 동원해 법적 처리를 압박하는 등 강압수단을 행사했으며 ▦지방지 통폐합은 1980년 4월께부터 각 지방언론 사주들의 비리행위 등을 조사한 후 통폐합 대상을 선정해 11월 보안사 지역부대별로 집행했다. 지방지 통폐합은 형식적인 결재조차 받지 않은 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임의로 이뤄졌다 통폐합 과정에서 신군부는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언론사와 개인의 재산을 환수ㆍ기부채납하게 했다. 또한 기자재 가격만으로 통폐합한다는 계획하에 언론사가 사전에 정한 인수액을 수용할 것을 강요했다 언론인 해직은 보안사가 신군부에 비판적인 언론계 인사들을 선정해 명단을 작성, 이를 언론사에 전달해 해직하도록 했다. 당시 언론사는 보안사로부터 지시받은 일정 비율에 따라 자체적으로 해직 대상자를 선정한 후 부조리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언론인을 해직했다. 해직된 언론인 가운데 일부를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고 해직 이후에도 취업을 제한해 생존권을 위협하는 등 공권력을 위법ㆍ부당하게 행사했다고 진실화해위는 지적했다. ◇사건개요1980년 언론사 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사건은 1980년 11월12일 신군부에 의해 ‘언론계 구조개선’이라는 명목하에 신문사 28개, 방송사 29개, 통신사 7개 등 64개 매체로 활동하던 언론기관이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 등 18개 언론사로 통폐합되고 172종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됐으며 언론인이 대량 해직된 사건이다. 신문사는 7개의 종합일간지 중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통폐합됨으로써 6개지로 개편되고 석간이었던 서울신문이 조간으로 바뀜으로써 조ㆍ석간 각 3개지로 재편됐다. 경제지는 4개사(서울경제신문ㆍ내외경제ㆍ매일경제ㆍ현대경제) 중 서울경제신문과 내외경제가 각각 한국일보와 코리아헤럴드로 통폐합돼 2개 경제지로 재편성됐다. 지방지는 1도1사 방침에 따라 대구ㆍ경북의 영남일보는 매일신문으로 부산ㆍ경남의 국제신문은 부산일보로, 경남일보는 경남매일로 각각 흡수됐고 광주전남의 경우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이 통합되는 등 14개 신문사가 10개의 신문사로 재편성됐다. 방송의 경우 방송공영화라는 취지로 5개 언론사(동양ㆍ동아ㆍ대구한국FMㆍ서해방송ㆍ전일방송)가 한국방송공사로 통폐합됐고 CBS는 보도ㆍ광고 기능이 정지됐다. 문화방송 및 지방 문화방송 21개사는 해당지역 민간인들이 대주주로서 각자 독자적으로 운영했으나 36~51%의 주식을 문화방송 경향신문에 양도해 계열화하고 이 중 울산ㆍ삼척ㆍ마산ㆍ춘천 문화방송의 자산은 국고에 환수한 후 농림부를 통해 문화방송 경향신문에 매각했다. 고려화재ㆍ미원ㆍ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ㆍ현대건설ㆍ해태건설ㆍ동아건설 등이 소유했던 문화방송 주식 70%는 국가에 기부채납된 뒤 재무부에 의해 한국방송공사에 현물 출자됐다. 통신의 경우 2개 통신사(동양ㆍ합동통신)가 해산된 뒤 신설 통신사(현 연합뉴스)로 통합됐고 군소통신 4개사(시사ㆍ경제ㆍ산업ㆍ무역)는 해산됐다. 통폐합 이후 새 통신사 설립에 참여한 동양ㆍ합동 양 통신사의 지분은 다시 양도돼 실질적으로 국가가 그 지분의 71%를 행사하게 됐고 지방주재기자를 없애고 신설 통신사만 주재기자를 두도록 함으로써 단일 통신사를 통해서만 기사가 제공되도록 했다. ◇서울경제신문 폐간 압력 받아이종승 서울경제신문신문ㆍ한국일보 사장은 “1980년 11월12일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이 보안사에서 서울경제신문 자진 폐간을 종용받고 버텼으나 ‘이미 정해진 것이니 되돌릴 수 없다’ ‘불응시 한국일보가 넘어갈 수도 있다’는 위협 속에 각서를 쓰고 나온 뒤 11월25일 자진 폐간신고서를 제출했다”고 진술했다. 임종건 서울경제신문신문 부회장은 “한국일보를 다른 신문사와 통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압박 때문에 장 회장이 어쩔 수 없이 서울경제신문을 포기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동양방송을 내놓았고 동아일보는 동아방송을 내놓았으니 한국일보도 서울경제신문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유로 서울경제신문을 폐간하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실제 한국일보를 담당한 보안사 언론대책반 수집관 이모씨도 “대략 1980년 봄 무렵부터 언론인에 대한 동향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사의 성향 분석 및 이슈 기사의 분석과 경영 상태에 대한 첩보 보고, 언론사와 언론인의 비리와 관련된 내용 등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서울경제신문 폐간은 한국일보 매체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언론사와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장 회장에게 ‘로비로 될 문제가 아니다. 포기하라. 형평성이 있으니 매체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니 참조하라’고 미리 귀띔을 해줬다”고 말했다. 장 회장의 비서실장인 배모씨는 “1980년 10월 이전 한국일보를 폐간조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1980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평소 친분이 있던 권정달 정보처장을 5~6회가량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권 처장에게서 ‘3허가 작심을 한 것 같다. 한국일보는 신문이 많으니 신문 중 하나를 없애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했다. 배씨는 “각서를 작성한 후 장 회장에게서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으로부터 아버지가 부총재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고 있다. 신문사를 없애고 싶나, 며칠을 여기서 자고 가고 싶나. 망신을 한번 당하고 싶나 등의 수모와 협박을 받았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신군부, 언론 통폐합에 불응할 경우 법적 처리 계획신군부는 언론사 사주들이 언론 통폐합에 응하지 않을 경우 법적 처리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보안사 수집관의 진술을 통해 언론사와 사주들의 비리가 조사됐고 비리를 조사한 이유는 통폐합 불응시 이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보안사 대공처장의 진술, 언론 통폐합에 앞서 언론사 사장이 삼청교육대에 입소했던 점 등을 볼 때 언론사 사주들이 당시 분위기에서 사회ㆍ경제적 파멸과 구속 내지 가혹행위 등 신변 위협을 받았음이 인정된다고 결론지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