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4월18일] 리비히
권홍우 편집위원
과학이 세상을 만났다. 학문을 위한 학문이었던 과학이 산업과 접목하고 실생활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다.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리비히(Justus von Liebig)가 그 주인공. ‘비료의 아버지’로도 기억되는 사람이다.
염료상의 아들로 1803년 태어난 리비히의 중학교 성적표는 화학만 빼고 낙제. 학교에서 쫓겨날 정도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그를 당시 화학연구의 중심지던 파리로 보냈다. 선생은 게이뤼삭. ‘기체 반응의 법칙’을 규명해낸 당대의 대가였다.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게 된 리비히는 연구에 매달려 뇌산 등의 화학식을 규명해냈다. 낙제생에서 세계적 학자로 탈바꿈한 그는 독일로 돌아와 기센대학의 교수자리를 꿰찼다. 21세의 나이였다.
애송이 교수의 강의는 인기를 끌었다. 실험실습을 중시했기 때문. 여가시간에나 실험을 하던 기존 교수들과 달리 그는 과학의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리비히의 실험실은 유럽 최고의 과학산실로 자리잡았다. 독일이 2차대전 직전 세계 약품ㆍ화학제품 시장의 90%를 장악했던 것도 그가 길러낸 제자들에 의해서다.
리비히는 농업에서도 발자취를 남겼다. 공기 중에서 질소비료를 생산하는 이론적 바탕이 그에게서 나왔다. 뮌헨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873년 4월18일 사망하기까지 그는 의학과 화학을 연구하며 인간활동의 에너지원이 단백질이라는 사실과 인공합성 방법도 밝혀냈다. 인류의 신장이 커지는 데 공헌한 셈이다.
오늘날 리비히는 사회 전분야에서 인용된다. ‘필수영양소 중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요소가 아니라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리비히의 최소율 법칙’은 정치ㆍ사회 분야의 개선점을 지적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다. ‘부족한 2%’에 우리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을까.
입력시간 : 2006/04/17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