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박서보 화백과 대표작‘묘법’ . 대형 캔버스에 한지를 찢어 붙이고 결을 내는 작업에 수개월 이상이 걸린다. 사진제공=샘터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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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출판사 아술린(Assouline)이 한국 현대미술 1세대 화가인 박서보(78ㆍ사진)의 예술세계를 정리한 작품집을 최근 출간했다. 뉴욕에 본사를 둔 아술린은 예술ㆍ디자인ㆍ패션 전문 서적 출판사로 각국 미술관 관계자는 물론 미국 상류층, 유럽 왕족들이 주요 구매자이다. 아술린이 아시아 작가를 단독으로 조망해 책을 내놓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박 화백은 “내년이면 내 나이가 여든이고 내 그림 인생도 어느덧 환갑을 맞는 때인 만큼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 시간과 작품을 돌아볼 좋은 기회”라고 소감을 밝혔다.
◇화단의 도깨비=1956년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갖던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반(反) 국전선언’을 곁들인 전시가 열렸다. 20대의 젊은 박서보였다.
1958년에는 김창열ㆍ하인두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창립했고 이는 60년대 한국 화단을 지배한 엥포르멜(Informel) 운동의 기반이 됐다. 한국적 추상인 엥포르멜은 기하학적이고 정형화된 미국식 추상과 달리 화가의 감정과 비정형 표현력이 강조돼 서정적 추상, 뜨거운 추상으로 불리는 화풍으로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변환점이 됐다.
그는 “당시 국전은 추상과 현대미술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비판 받아야 했다”며“나는 그 일로 한 동안 ‘도깨비 같은 놈’이란 소리와 함께 질타 당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른이 되던 61년, 그는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이라는 나라이름 조차 생소하던 그 시절. 박화백은 “거리를 다니다 보면 ‘시누아(중국인)’, ‘자포네(일본인)’냐고 묻는 일이 허다했다“면서 “그래서 더욱 우리나라를 알리고 우리 미술의 독보적인 면을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져온 그의 미술세계는 70년대 단색 회화, 80년대 이후 ‘묘법’ 시리즈로 변화했다. 그 화풍은 한국 현대미술 연표작성의 기준이 됐다.
◇녹슬지 않은 쓴 소리=미술사적 평가 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박화백의 인기는 뜨겁다. 작품가는 억대를 넘고 ‘팔지 않아 못 사는 작품’이 됐다. 하지만 그는 “옛날에는 ‘내 작품 갖고 가 걸어만 달라’고 사정하던 시절이 있었고 80년대 후반까지도 잘 팔리지 않았다”면서 “가난과 궁핍이 창조의 어머니인지라 나만 해도 아이 우유값을 벌기 위해 (자신의 화풍과 다른) 파리 풍경 같은 것을 그려서 화랑에 팔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그의 구상화는 스승이었던 고(故) 김환기 화백 등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했던 작품들이다.
근근히 생계를 이으며 그가 추구했던 작품은 기존의 것을 모두 뒤엎고 형태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들이었다. 붓질과 연필질의 반복,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이고 찢어서 반복된 선을 만드는 묘법 시리즈는 그렇게 태어났다.
미술사학자 바바라 로즈는 박서보의 작품을 두고 “과거의 문학적이거나 상징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과 사회를 표현한 것”이라며 극동지역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 화백의 작품을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 공용의 대학 미술교재에 아시아 현대 작가 중 백남준과 더불어 그가 유일하게 등재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작가로 모든 것을 이룬 듯 하지만 박 화백은 지금도 14시간씩 작업에 매달린다. 그는 매서운 눈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요즘 작가들을 꾸짖기도 했다.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럴싸한 이름으로는 ‘번안’한 작품, 노골적으로 말하면 ‘모방’이 보여요. 이 점이 개념주의 미술이 갖는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이며 위험요소예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합니다.”
◇박서보 누구인가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54년 홍익대 회화과 졸업했다. 1962년부터 1997년까지 홍익대 회화과 교수와 학장까지 지냈다. 파리, 상파울루, 베니스 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전에 참여해 한국미술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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