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군왕은 무치(無恥)`라며 다소 비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당대에서만큼은 덮어주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또 종교적으로 최고 성직자에 대해서는 `무류성(無謬性)`을 주장하기도 한다. 군왕이나 성직자는 신성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개발연대에는 통치권자들이 `무류의식` 속에 그들의 개발 독재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간주했다. 또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 그들이 옹호하는 집단 역시 `무류`가 된다. 수천년간 지속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을 축적시켜 대기업을 육성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소의 기업비리는 오히려 윤활유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아왔다. 수년 전 벤처 붐이 일었을 때 이땅의 젊은 기업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은 것도 이와 같은 무류의식이다. 오랜 재벌구조의 경직성을 타파하고 창의성과 역동성을 발휘해 이 나라를 신지식ㆍ신기술로 다시 세우겠다는 데 다소 거품이 있다고 해서 무슨 큰 잘못이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도 신기술 벤처기업만이 미래를 향한 돌파구라며 그들의 무류의식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측면이 있었다.
또 외국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우리 기업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강성 노조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무류의식과 비슷할 것이다. 그동안 억압받고 착취당했던 근로자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은 `지고의 선`이며 기업은 근원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바꿔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개혁의 깃발을 펄럭이는 측도, 무모한 개혁을 비판하는 측도 무류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네 탓이라는 목소리는 크고 내 탓이라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는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상대방의 주장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참다운 토론은 없고 말다툼만 있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축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완벽한 무류를 주장할 수 있는 집단이나 계층이 어디 있겠는가. 내 생각만 옳다며 우리끼리 다투기에는 세계는 너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참여ㆍ통합을 통해 변화를 지향해야 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류의식을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보다는 두루두루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학 교수들이 원전수거물관리시설을 서울대에 두자고 주장한 것은 그 타당성과 실현성 여부를 떠나서 `극단적인 자기 주장보다는 열린 마음`을 강조하는 참신성이 돋보였다.
<조환익 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