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남해회사가 뭐길래? 대박에서 쪽박까지


주식 투자 열풍이 18세기 초 영국을 달궜다. 귀족에서 하인까지 주식을 사려고 덤볐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량주식 투자란 1%만의 전유물. 정보력을 독점한 극소수 고위층만의 특권이었다. 인도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던 동인도회사의 주주라야 500명 남짓했으니까.

주식투자 열풍의 시발점은 1687년 터진 윌리엄 핍스의 횡재. 침몰된 보물선을 찾아내 은 32톤, 금괴 11㎏을 건져 올리며 투자자들에게 1만%를 배당한 뒤 보물선 발굴과 탐사회사 설립이 붐을 이뤘다. ‘큰 이득을 올리는 사업이 분명하지만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는 회사가 설립돼 단 5시간 만에 투자금을 받아 영국을 튀는 웃지 못할 경우까지 생겨났다.

대중의 관심이 모인 광기의 끝은 폭락. 17세기 말 영국의 주식회사 붐은 오래 못 갔다. 1693년 140개였던 상장회사가 1697년 40개로 줄어들었다. 한번 불붙은 투자에 대한 관심은 가치주 투자로 옮겨갔다. 마침 폭락장세 속에서도 잉글랜드 은행 설립(1694년)에 참여한 투자자들이 남긴 차익이 뇌리 깊게 박혀 있던 상황에서 대형 호재가 나왔다.

주역은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스페인과 무역 독점권을 따내며 1711년 출범했으나 소규모 이익에 머물던 이 회사가 1720년 초 발행주식과 주식을 연계하는 신종 금융기법 ‘인그래프트먼트(engraftment)’를 도입하며 시장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정적으로 ‘회사가 망해도 국채 수익률은 보장된다는 믿음이 투자자들을 불러모았다.

설립 후 9년간 주당 100파운드대에 머물던 주가는 3배 할증 발행이라는 신규공급에도 6월 초 89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상투권을 의식한 경계매물이 나오자 회사는 주식을 사들이며 주가관리에 나섰다. 헛소문도 퍼졌다. ‘스페인으로부터 남미 지역 전항구에 대한 기착권을 따냈으며 금광을 발견했다’는 정보에 8월 초 주가는 정점을 찍었다. 주당 1,000파운드.

진실은 주가 너머 저 멀리에 있었다. 스페인으로부터는 연간 1척 운항권을 인정받았을 뿐이고, ‘금광 발견설’은 회사 측에서 퍼트린 루머였다. 결국 ‘사상 최고의 회사’라는 투자자들의 찬사도 오래가지 않았다. 재료가 의도적인 루머로 확인되고 이웃 프랑스에서 주식투자 광풍을 낳았던 ‘미시시피 회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영향이 겹쳐 9월 주가는 150파운드로 주저앉았다.

투자자들의 항의 속에 영국 의회는 특별 조사에 나섰으나 진상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다. 사실상 국가가 주도한 투기 열풍이었던 탓이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대북방전쟁에 참전하느라 재정이 고갈된 영국 정부는 국가 채무의 상환을 잉글랜드은행, 동인도회사, 남해회사 등에 국채를 떠안긴 끝에 시장의 파국을 불렀다.


1721년 1월 6월, 영국 의회조사단이 보고서(경제 용어로 bubble이란 용어가 이때 처음 쓰였다)를 낸 이후 영국 경제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주식’은 금기어로 통했다.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에 따르면 영국의 팽창세도 약 100년간 꺾였다.

영국은 경제 부진 상태에서 프랑스와 7년 전쟁(1756~1763: 킨들버거는 유럽 전역과 북미, 인도 등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동시다발적으로 싸운 이 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간주한다)을 벌여 겨우 이겼으나 속(재정)은 더욱 곪아갔다.

재정이 허약해진 영국의 선택은 조세 강화. 납세 의무를 전혀 부담하지 않았던 북미 13개주 식민지에도 종이와 차, 사람에 대해 각종 조세가 할당되기 시작했다. 식민지의 조세부담률은 본국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나 한번 시작된 조세저항은 미국 독립전쟁으로 번지고 영국은 북미 식민지를 잃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주가 급등과 대박이 과연 축복이었을까. 자본주의 초기 3대 버블(네덜란드 튤립 투기·프랑스 미시시피회사 사건·영국 남해회사 포말 사건)에는 공통점이 나온다. ‘이상 과열은 급락의 전주곡’이었다는! 인간은 불나방처럼 황금의 불꽃에 향해 뛰어들지만 나방의 날갯짓은 연쇄 작용을 거치며 파국을 부채질했던 셈이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사족 1. 남해회사는 1838년까지 존속했고 그 채무는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갚지 못했다.

사족 2. 남해회사 버블은 근대적 회계제도 탄생에도 일조했다. 영국 의회의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회사 내부의 회계일지가 훗날 외부감사에 의한 회계보고서로 자리잡고 공인회계사 제도 도입을 이끌었다.

사족 3. 투기 광풍의 초기 아이작 뉴턴은 매도 시점을 잘 골라 7,000파운드의 수익을 올렸으나 주가가 더 오르자 욕심을 내고 주식을 한껏 사들여 결국 2만 파운드를 날렸다. 요즘 돈으로 20억 이상을 날린 뉴턴은 ‘복잡한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으나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로빈슨 크루소(1719)’의 저자로 유명한 대니얼 디포는 더욱 큰 손실을 입었다. 소설가 이전에 사업가이자 투기꾼, 파산자, 최초의 경제평론가에 밀정까지 다양한 인생역정을 걸었던 그는 남해회사 투자로 거액을 잃고 빚쟁이를 피해 종적을 감춘 뒤 남해회사 버블이 알려진 지 10년 만인 1731년 런던 근교에서 객사했다.

사족 4.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독일 태생의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은 남해회사 투기에서 일찍 빠져나와 벌어들인 돈으로 세운 음악학교도 잘 되자 41세인 1726년 아예 영국에 귀화해 눌러 앉았다. 진짜 성공한 사람은 따로 있다. 사라 처칠. 영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인 존 처칠의 부인인 그는 친구관계인 앤 여왕의 후광으로 정·관계 인물들과 두터운 인맥을 쌓고 남해회사 주식을 최고점에 팔아 1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요즘 가치로 수백억원을 챙긴 사라 처칠의 9대 손자가 2차 대전에서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이다.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인 레너드 처칠 부인(제니 제롬)은 미국의 주식 투기꾼인 레오나드 제롬의 딸. 유럽 귀족과 미국 신흥 졸부간 혈통 결혼의 산물이 처칠이었다. 정작 18세기 영국 투기꾼 조상과 19세기 미국 투기꾼 외조부를 둔 처칠은 미국 주식에 손댔다가 재산을 왕창 날리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팔고서아 빚을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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