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트럼프, 골드워터의 사생아… 공화 스스로 괴물 만들어"

1960년대까진 중도보수 유지… '큰 시장-작은 정부론' 내세운
대선후보 골드워터 등장 이후 인종·종교 등 극단주의 치달아
초강경 보수주의가 공화 장악
"공화 정체성 위기" 분열 움직임속 1964년 대선 참패 재연 가능성

'아웃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요즘 미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 초강경 보수주의자였던 배리 골드워터(1909~1998·사진)다. 지난 1964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그는 흑인 시민권 반대, 소련에 대한 핵 공격 등 극단적인 정책에다 당시에는 비주류였던 '큰 시장-작은 정부론'을 내세웠다가 민주당의 린든 존슨 후보에게 대패했다.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가 인종차별적인 발언 등에 힘입어 저소득·저학력·백인 등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대선에서는 '골드워터 참사'를 재연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념적 색깔도 모호한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될 경우 공화당이 정체성 위기를 겪으며 둘로 쪼개질 것이라는 위기감도 크다. 하지만 미국 내 진보 언론들은 공화당을 장악한 골드워터 후예들이 뿌린 자업자득이라고 보고 있다. 인종, 종교, 동성애, 총기 소유 등의 문제에서 극단으로 치닫다가 마침내 통제 불가능한 '괴물 사생아'를 낳고 말았다는 것이다.

◇"공화당은 링컨 아닌 골드워터의 당"=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화당을 장악한 세력은 중도 보수였다. 하지만 골드워터의 등장이 공화당의 이념적인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사회복지 확충 반대, 월남전 확대, '매카시즘'으로 악명 높은 조지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대한 불신임 결의 반대,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한 핵실험 경쟁 옹호 등 극단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는 흑인들의 시민적 권리를 보장한 '민권법'에 대한 백인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1964년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에도 올랐다. 온건 보수와 강경 보수로 갈라진 결과는 비참했다. 골드워터가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겨우 50명으로 존슨 대통령(486명)의 10분의1에 불과했다. 미 대선 역사상 최악의 참패였다.


하지만 골드워터 이후 공화당은 민주당 지지층이었지만 인종 문제 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던 남부와 중하류 백인 유권자들을 빼앗아왔다. 공화당 최초의 대통령이자 노예 해방을 이끌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에서 딕시(Dixie·남부로 대변되는 강경 보수층)의 당으로 변모한 것이다. 골드워터 세력들은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대공황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공화당 내에서도 대세였던 '큰 정부-작은 시장'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골드워터 선거운동으로 정치를 시작한 뒤 1980년 백악관에 입성해 신자유주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군비 경쟁을 통해 소련을 붕괴시켰다. 지금도 공화당은 골드워터의 후예들이 장악하고 있다.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 의원은 신보수주의 세력인 네오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최근 경선을 도중 하차한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도 전형적인 '큰 시장-작은 정부' 지지자다.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2위를 달리고 있는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 의원은 당내 극우 세력인 '티파티'의 총아다.

◇"트럼프는 골드워터의 사생아"=공화당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밋 롬니 후보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패배하자 '성장과 기회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자체 평가보고서를 만들었다. 두툼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이념에만 매몰되지 말고 '따뜻한 보수주의'를 보여줘야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빈곤층·소수인종 등으로 지지층을 확장하고 동성 결혼, 낙태와 같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가능한 논쟁을 피하자고 조언했다. 당시 롬니 후보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희생자라고 믿는다"고 말했다가 '부자 편 후보'라며 역풍을 맞은 데 대한 자기반성이었다.

하지만 실제 행동은 정반대였다. 미 의회 선거구가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선거구를 정하는 일)'으로 짜인 탓에 백인 지지층이 좋아할 만한 주장을 펼쳐야 당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역구 당선이 시급한 공화당 의원들은 오바마 대통령을 공격하느라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업무정지) 사태를 불사했고 오바마케어·이민개혁·총기규제 등에 대해 대안 없는 반대로 일관했다.

티파티 세력은 오바마 대통령과 타협하려던 중도 성향의 존 베이너 하원 의장까지 몰아냈다. 2012년 대선 당시 롬니 후보는 선거운동을 돕던 트럼프가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 의혹을 집요하게 공격할 때도 수수방관했다. 크루즈 의원은 경선 초기에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자는 트럼프의 주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이라 부르고 모든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트럼프의 극단론이 먹힐 만한 토양을 공화당이 스스로 만들어온 셈이다. /뉴욕=최형욱특파원 choihu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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