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경희대 부총장
선진국들은 한결같이 시장경제 국가들이지만 각 국가에 존재하는 시장의 형태는 사뭇 다르다. 미국·일본·독일의 시장경제는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하고 진화해왔다. 이처럼 각 나라의 시장경제가 서로 다른 모습을 갖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정치다.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법과 규제의 틀을 만드는 것도 정치를 통해서이고 경제주체들이 차지하는 소득의 몫도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조세와 재정정책, 최저임금제와 가격규제정책 같은 경제정책들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고 국민 각자가 어떤 몫을 차지하느냐가 결국 정치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인 주권재민, 즉 국민이 주인인 세상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각 정당이나 후보가 경제공약을 내걸고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경제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가 자신이 행사하는 한 표를 통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한국 경제가 미국식으로 갈지 일본식으로 갈지 독일식으로 갈지 어떤 모델로 어떻게 나아갈지도 결국 한국 정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불행히도 한국의 정당들은 한국 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하고 진화해가야 할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없다. 한국 정치의 모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자기 당 소속의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기만 하면 된다. 경제공약들도 한결같이 선심성에다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들이다. 빈 공약을 남발해서라도 당선만 되면 됐지 공약 그따위 것 지키지 않은들 무슨 대수냐는 식이다. 대한민국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기를 그만둔 셈이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들마저 선거의 의미와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권력에 눈이 멀어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들이나 좋아할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선거운동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세 가지는 있다. 첫째, 이번 선거의 큰 틀, 소위 프레임이 그래도 경제선거라는 점이다. 더민주당이 들고 나온 경제심판론이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여당은 야당이 국회에서 발목을 잡아 경제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국회심판론을 들고 나왔다. 선거를 앞두고 원내교섭단체를 가까스로 만든 국민의당은 두 거대 정당의 기득권 정치를 나무라며 정치심판론을 들고 나왔다.
둘째,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탈출구를 놓고 양대 정당이 매우 다른 처방을 제시하며 공방을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한국은행의 양적 완화정책을 통해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더민주는 경제민주화를 통해 양극화와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조정과 불평등 완화는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들이다. 저성장과 침체의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결국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셋째, 선거공약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낮다는 것을 간파한 한 정당이 대한민국과의 계약이라며 5대 개혁 과제를 20대 국회 첫 1년 이내에 이행하지 않으면 자당 소속 국회의원의 1인당 1년 치 약 1억5,000만원의 세비를 국가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정당과 그 후보들을 지지하는지 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 공약만큼은 반드시 지켜지도록 국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으면 좋겠다. 이 약속이 지켜지도록 하면 한국의 선거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정치는 국민들로부터 낙제점을 받고 있다. 정치인들이 마치 원수처럼 싸우면서 서로가 아무 일도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이러한 정치인들과 정당들에 대한 심판을 하는 일이다. 국민 각자가 나를 대신해서 국정에 참여할 대리인이자 머슴을 뽑는 일이다. 주인은 국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유권자 모두가 이 헌법조항을 가슴 깊이 되새겨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