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단순하다. 초(秒) 단위로 변화하는 글로벌 경영 환경 속에서 기존의 경영 관습을 고수하다가 서서히 끓어오르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어느 순간 회사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 때문이다.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이었던 핀란드 노키아가 스마트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게 대표적인 사례다.
기업들을 내부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혁신 바람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전문가들은 지배구조 및 경영체제의 변화가 소프트파워 혁신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복잡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 중앙집권식 전략본부를 통한 상명하달식 지도 체계로는 조직원들의 창의적인 발상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며 “오는 2017년에는 삼성·현대자동차·롯데그룹 등에서 지배구조와 경영 체계 ‘빅뱅’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옥상옥(屋上屋) 전략본부 쇄신작업 돌입=우선 각 기업들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던 ‘전략본부’들이 수술대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삼성의 미래전략실이나 SK의 수펙스추구협의회, 롯데의 정책본부 등이 이런 조직들이다.
이 같은 전략본부들은 각 그룹의 엘리트들을 한군데로 모아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압축·고도 성장을 이끌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같은 기업의 존망이 걸린 위기 때는 구조조정 집도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톱-다운’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는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한 국내 대기업들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대기업들은 중앙집권식 전략본부를 두고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왔는데 3~4세 경영인 등장 이후 기업들의 규모가 글로벌 수준으로 커지면서 중앙집권식 기구가 전체를 아우르는 데 점차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법상 근거 규정도 없는 전략본부가 각 계열사의 경영을 사실상 관장하면서 주주들의 정당한 경영 참여가 사실상 제한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동시에 제기된다.
그룹별로 컨트롤타워의 힘을 빼는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롯데의 경우 정책본부를 지원 전담 기구로 재편하는 내용의 쇄신안을 다음달 중 내놓을 계획이다. 삼성은 지난해 미전실에 파견 나와 있던 태스크포스(TF) 인원 상당수를 원대 복귀시켜 규모를 슬림화했고 SK수펙스추구협의회 역시 연말 조직개편에서 덩치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주사 전환작업 속도 낼 듯=삼성·현대차그룹의 지주사 전환 작업도 올해 말 이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그 배경은 크게 나눠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현재 지배구조 체제로는 외부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헤지펀드 엘리엇의 공격을 받은 삼성물산의 경우 전 직원들이 수박과 케이크를 사 들고 소액주주들을 만나 설득작업을 벌이느라 거의 2달가량 업무 공백이 빚어지는 뼈아픈 경험을 겪기도 했다.
또한 엘리엇은 최근 공격대상을 삼성전자로 옮겨 30조원의 특별 배당을 하라고 요구하며 다시 한 번 삼성을 흔들고 나섰다. 엘리엇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고작 0.62%에 불과하지만 취약한 지배 고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재계는 2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에 발맞춰 삼성전자 인적분할과 삼성물산 합병 등의 작업이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불어닥치고 있는 경제민주화 바람도 부담이다. 마침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정치 지형이 재편돼 기업들이 지배구조 쇄신에 압박을 느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발의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보면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도록 강제하거나 공익법인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등 기업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법안들이 많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살펴보면 현대차그룹에 민감한 내용들이 많다”며 “지배구조 문제를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정리해야 정치권의 변덕과 관계없이 품질논란과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경영 효율화도 지배구조 개선의 배경으로 꼽힌다. 지주회사 아래 중간지주사를 도입하면 유사 계열사를 한군데로 모아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주요 기업들의 판단이다. 실제로 SK는 최근 최고경영자(CEO) 세미나를 통해 중간지주사 도입을 공론화했다. /서일범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