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640만명. 숫자만으로도 가슴이 턱 막힌다. 더 심각한 것도 있다.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다. 최근 고용노동부의 사업체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비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이 정규직의 42.2%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만이 아니다. 사회보험의 격차도 엄청났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올해 3월 기준 정규직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83.2%였지만 비정규직은 겨우 37.5%에 불과했다. 건강보험이나 고용보험 가입률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두 배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유급휴일제도조차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비정규직 세 명 중 한 명만이 유급휴일을 가질 수 있었던 셈이다. 절망적이다. 이 정도면 ‘노동자 연대’의 가치조차 무색해질 판이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조선과 자동차, 그리고 전자 산업에 닥친 위기 때문이다. “삼성 갤럭시노트7을 소지하신 분은 반드시 전원을 꺼주십시오.” 항공기 승무원의 기내 방송은 야속하리만치 또렷하게 들렸다. 스마트폰의 신화는 그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세계 1등 조선 산업의 추락은 가히 드라마틱할 정도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도크 수를 24개로 대폭 줄여야 할 판이다. 자동차는 또 어떤가. 언제나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자동차 산업도 외국 브랜드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3·4분기 최악의 실적을 내면서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29.0%나 급감했다. 새롭게 들어설 미국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정책 역시 악재가 될 듯싶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의 주력 산업들이 동시다발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가 진짜 우려스러운 점은 단지 몇몇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 노동시장은 원청이 감기에 걸리면 하청은 폐렴을 앓게 되는 구조다. 고약하게도 그 고통은 노동시장의 가장 약한 부위부터 먼저 파고든다. 이는 고스란히 협력업체와 하청 근로자, 그리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몫이다. 실제로 조선 산업의 구조조정 과정만 봐도 그렇다. 우선 하청 인력부터 덜어내느라 바쁘다. 내년까지 최대 6만3,000명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한다. 암담하다.
한편 현대차 정규직 노사는 한동안 임금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영업손실이 무려 3조원을 넘어선다고 한다. 그렇다면 협력업체들이 감내해야 할 부담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끔찍하다. 공공 부문 비정규직 청년들이 ‘위험의 외주화’로 쓰러져가고 있는데 정작 노사는 성과연봉제를 둘러싸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다. ‘격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궁금하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둔 채 국가나 기업의 경쟁력을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맹목적인 애국심 마케팅은 통할 리 없다. 무모한 가격 경쟁도 소용없다. 국민과 고객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노사관계의 구조와 전략이 변해야 하는 이유다.
만약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원청과 하청 노사가 모두 모여 ‘일자리 나누기’에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근로조건은 일시적으로 나빠지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훨씬 따뜻해질 것이 틀림없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다. 최근 현대차의 국내 점유율이 60% 이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만약 노사가 정규직 임금 상승을 자제하는 대신 협력업체 하청 근로자들의 임금을 높여주는 결단을 내렸으면 어땠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비정규직과 가족들이 바로 그 귀하디귀한 ‘고객님’들이 아닌가. 당장 그들부터가 가만있을 리 없다.
바야흐로 격차의 시대다. 비정규직의 ‘소리 없는 절규’에 응답해야 한다. 단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분명히 하자. 원청의 희생과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확신이 필요하다. 격차를 없애는 일은 분명 원청의 ‘생존전략’이요 가장 확실한 ‘투자’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