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엘리트 경제관료]국회에 치이고 세종섬에 갇혀 무기력...책상머리 정책 양산 우려

<중>고립되고 떠나고 외면받는 관료
서울~세종 오가며 피로 쌓이고 정책 세워도 무용지물
"장차관하면 뭐하나..." 이전후 1,000명 스스로 떠나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 남발땐 국민·기업 피해 불보듯

사표를 낸 지 4주 만에 수리가 됐다는 경제부처의 전직 A 관료는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그간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A씨는 “많은 고민을 했다. 20여년 이곳에 있었으니 마음을 접는 게 쉽지는 않았다”면서 “소식을 듣고 장관이나 차관·1급 등을 했던 선배들로부터 전화도 제법 받았다. 어느 선배의 말이 와 닿았다. ‘장차관 하고 나온들 뭐 할래’였다”고 했다.

A씨는 왜 사표를 내야 했을까. 그는 “유학도 갔다 왔고 해외근무도 하는 등 혜택도 많이 받았다. 못해도 차관까지는 가보자는 포부도 컸다”며 “하지만 어느 순간 흥미를 잃었다. 왜,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동인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퇴직 후 3년간의 취업제한으로 퇴로가 막힌, 과거의 사무관·서기관급으로 전락해버린 고위직들의 모습을 보면서 관료로 끝을 내자는 포부가 사라진 듯했다. A씨는 “문제는 나와 같은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제2의, 제3의 A씨가 정부세종청사에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특히 정부 부처가 대거 세종시로 옮긴 후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4일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5급 이상 공무원 중 명예퇴직을 제외하고 의원면직한 사람은 1,000명에 육박한다. 행선지는 주로 기업이다. 일부는 관을 상대로 한 로비스트 역할도 한다. 국가가 예산을 들여 연수 등을 통해 양성했고 또 그들 스스로 행정 경험을 통해 노하우가 축적된 인재들이 민간으로 대거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종시 이전 이후 부처 간 인사 교류를 신청하는 공무원들도 적지 않다. 서울청사와 세종청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느끼는 피로감과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업무 몰입도가 주요 원인으로 풀이된다. 길 위의 김 과장이나 평일 오후에도 상사가 없는 무두절(無頭節)을 보내는 박 사무관이 늘고 있다. 업무보고는 카카오톡 등 메신저로 이뤄지고 선배가 후배를 책임지고 가르치는 도제식 시스템도 무너진 지 오래다.

가장 큰 문제는 세종시가 ‘갈라파고스’처럼 되면서 책상머리 정책이 대거 양산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은 결국 국민과 기업의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이코노미스트 겸 경제정보센터소장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는 하지만 직접 만나 얘기를 듣고 현장을 체험하는 소통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공무원들이 과거처럼 소신 있게 정책을 생산할 수 없는 환경도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밤을 세워 정책을 만들어도 결국 국회에 가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국회에 발목이 잡혀 몇 년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서비스법 등 경제활성화법안이 대표적이다.

B 경제부처의 한 과장은 “정책결정권이 국회로 넘어간 지 오래”라며 “국회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C 부처의 한 고위관계자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공직에 진출해 장차관이 된다고 해도 본인이 생각하는 정책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회의적”이라고 전했다.
지난달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공무원들이 TV로 생중계된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상황이 이렇자 공직에 막 입문한 신임 사무관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일은 많지만 정책 영향력이 큰 기획재정부 등보다는 근무환경이 좋은 부처를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사무관들은 공직사회의 미래다. 관료사회의 근간까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선배들은 기획재정부에 가려면 재경직에서 적어도 30등 안에는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경직 80여명 중 60~70등을 해도 갈 수 있다. 서울에 있는 금융위원회의 인기가 가장 좋습니다. 부득이 세종을 택하는 경우 로펌 등에서 제2의 인생을 꿈꿀 수 있는 공정거래위원회가 1순위입니다.” 행시 재경직으로 지난해 4월 연수를 마치고 비경제부처로 발령을 받은 D 사무관의 말에는 경제 관료들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종=임지훈기자 jhl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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