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해체하라”는 여론의 거센 비판을 무릅쓰고 ‘변화’라는 카드를 선택한 것은 전경련이 우리 기업과 경제에 기여하는 순기능만큼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산업화 초기 재계의 ‘맏형’을 자처한 전경련은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과정에서 앞장서왔고 앞으로도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넘기 위해 전경련이 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혁신안 발표에도 ‘한국기업연합회’로 이름만 바뀐 모면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은 역대 정권의 비리에 연루될 때마다 혁신안을 내놓았지만 정경유착 창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1961년 1월 한국경제협의회로 출범한 전경련은 이미 ‘한국경제인협회(1961년 8월)’→‘전국경제인연합회(1968년 3월)’로 이름을 바꿨다.
무엇보다 전경련이 ‘경영이사회’에서 주요 결정을 하겠다고 한 것이 논란거리다. 전경련은 오너가 참여하던 회장단회의를 폐지하고 전문경영인협의체를 만든 만큼 독단적 결정 등의 관행이 줄어들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주요 회의의 참석자가 바뀌는 것만으로 전경련의 본질적 기능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협상 테이블에 앉는 사람의 급이 낮아졌을 뿐 목표나 지향점은 똑같다는 얘기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는 “전경련을 해체하지 않고 주요 의사결정자만 바꾸는 것은 혁신이 아닌 조직개편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전경련이 사회본부와 사회협력회계를 폐지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원천 차단하겠다고 한 데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정부 지원 관련 조직을 없앤다고 해도 불투명하게 이뤄지는 로비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재한 탓이다. 정부나 비선조직이 은밀하게 지원을 요구할 경우 이를 거절할 방법이 없는 만큼 정경유착의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로비는 드러내지 않고 하는 게 더 큰데 관련 부서를 없애는 것만으로 전경련이 정경유착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보는 이는 적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LG·SK 등 4대 그룹이 떠난 상황에서 전경련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경련 연간 예산의 70%가량을 담당해온 4대 그룹이 빠지면서 현재 전경련은 임직원의 월급을 줄 돈도 부족한 상황으로 알려졌다. 전경련 혁신조직과 예산을 대폭 축소하면서 불거질 인사나 직원 처우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해 회장 연임을 결정한 허창수 회장의 후임을 찾는 것도 과제다. 재계에서는 19대 대선이 끝난 뒤 후임 회장 등을 찾는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본다. 탈퇴한 주요 그룹을 다시 회원사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다. 주요 그룹들이 빠진 상황에서 경제단체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명분과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날 전경련은 조직쇄신 차원에서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배상근 전무가 전경련 총괄전무 겸 커뮤니케이션본부장을 맡았고 엄치성 상무가 국제협력실장, 이상윤 상무가 사업지원실장에 각각 임명됐다. 유환익 상무는 한국경제연구원으로 파견됐다. 이로써 기존의 전무·상무 등 임원 10명 중 4명만 남게 됐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