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족과 로마의 약탈…반달리즘



455년 6월 2일, 로마를 포위한 반달족(Vandals) 군대가 시내로 난입했다. 로마 역사상 세 번째 함락이었다. 첫 번째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하던 시절이었으나 귀족들의 기득권 집착에 실망한 평민들이 로마를 버리고 떠나자 방어력이 떨어졌다. 프랑스 지역에서 넘어온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휩쓸었다. 더 이상 빼앗을 게 없어 켈트족이 떠났을 때 로마는 철저하게 망가졌다. 두 번째는 제국의 퇴조 분위기가 뚜렷하던 410년 게르만의 일족인 서고트족의 침입. 6일 동안 교회만 빼고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탔다. 로마는 화를 자초했다. 게르만족의 침입에 맞서 로마를 지키던 명장 스틸리코를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한 것이다.

서고트족에게 당한 뒤에도 게르만족에게 시달리던 로마는 재앙을 만났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약 10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유린하며 공포에 몰아넣었다. 아틸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훈족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뒤, 이번에는 반달족이 찾아왔다. 게르만의 일족인 반달족은 오늘날 기준으로 스칸디아비아반도 남부와 독일 북서부 지방에 살다 훈족의 침입에 밀려 남하를 거듭했던 종족. 5세기 스페인 지방에 정착하며 함대를 키워 북아프리카에도 진출했다. 439년에는 카르타고를 수도로 삼아 반달왕국까지 세웠다. 바이킹처럼 해상세력으로 성장한 반달족은 지중해의 섬을 차례로 점령하며 로마를 압박해 들어왔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흥망사’에서 ‘교활하지만 탁월한 왕’으로 평가했던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리크의 침략을 앞둔 상황에서 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는 혼인 동맹을 대안으로 여겼다. 가이세리크의 아들과 자신의 딸이 성장하면 성혼하기로 약혼한 마당에 454년 정변이 일어났다. 로마는 두 번째 침공과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20년간 나라를 지켜온 아이티아누스 장군의 반역을 의심해 황제 손으로 직접 살해한 것. ‘왼손으로 오른손을 자른 꼴’이라던 기번의 말대로 로마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황제(26세)는 455년 3월 병사들의 손에 죽었다.

아들이 없었던 발렌티아누스 3세의 후계자로 추대된 원로원 의원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59세)가 추대됐으나 당장 국토 방위보다 황제로서 정통성 확보에 신경 썼다. 발렌티아누스 2세의 딸이자 전임 발렌티아누스 3세의 미망인 에우독시아(23세)와 결혼하고 전임 황제의 딸(16세)은 자신의 아들과 약혼시켰다. 의붓 자식들끼리 혼인시키며 황제로서 정통성을 지키려 애썼으나 정작 나라를 지켜줄 군대는 없었다. 가이세리크의 함대가 목전에 이르렀다는 소식에 겁먹고 도주하려 궁을 빠져나오자마자 분노한 시민들의 손에 죽었다.

반달족의 군대는 막시무스가 시민들의 폭동으로 살해된 지 사흘 만에 상륙해 로마를 포위하고 상수도부터 끊었다. 반달 족의 군대를 상대한 것은 로마군단도 시민병도 아닌 로마 교황 레오 1세. 3년 전인 452년 로마 진입을 눈 앞에 둔 훈족의 아틸라와 담판을 벌여 물러나게 만들었던 레오 1세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인 가이세리크와 성 밖에서 만나 조건을 내걸었다. 저항하지 않는 시민은 죽이지 않고, 숨진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지 않으며 방화 금지 명령을 내린다는 약속을 받고 교황은 성문을 열었다. 카이세리크는 반달족 군대에 엄명을 내리는 대신 약탈 기간을 늘렸다. 반달족 군대는 보름 동안 로마를 탈탈 털었다.


티누스 황제가 유대 전쟁에서 승리(70년)하며 약탈해 온 예루살렘 성전의 황금 식탁과 일곱개 촛대가 달린 황금 촛대를 비롯해 모든 게 약탈 당하고 뜯겼다. 신전 지붕의 청동에 입힌 금까지 떼냈다. 화려한 조각상과 장식품이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실려갔다. 약탈을 마친 반달족의 군대도 철수했다. 가이세리크는 황후였던 에우독시아와 그의 두 딸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가이세리크의 아들은 애초 약혼했던 대로 발렌티아누스 3세의 딸과 결혼하고 반달왕국의 후세를 이었다.

반달왕국은 영화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534년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군대에 멸망 당했으나 역사에 잔흔이 남아 있다. 이유 없이 문화재나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 용어 ‘반달리즘(vandalism)’이 반달족의 455년 로마 함락과 약탈로부터 비롯됐다. 종족의 혈통이 로마에 흡수된 채 사라졌지만 반달족으로서는 억울할 만 하다. 반달족이 약탈한 로마의 재화와 보물 역시 당시 서구 세계에서 약탈하고 수탈한 것이었으니까.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1세기 동안 포에니전쟁(로마-카르타고 전쟁)에서 도시가 소멸된 카르타고와 민족까지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의 한에 비하면 반달족에게 당한 로마의 상처는 훨씬 약했는지도 모른다.

로마를 진짜로 약탈한 것은 기독교도였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간 싸움이 한창이던 1527년, ‘가톨릭의 수호자’로 불리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짓밟았다.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맨스 7세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자 격분해 군사 2만 1,000명을 보내 로마를 지키던 교황군 5,000여명을 간단히 물리쳤다. 관례인 약탈기간 3일보다 닷새 많은 8일간의 약탈을 허용받은 병사들은 고대 로마시절부터 내려온 건축물을 부수고 고문서를 태웠다. 민간인 4만 5,000여명이 죽거나 집을 잃었다. 야만인들은 약탈에 그쳤지만 서구인들은 도시의 파괴를 넘어 로마문명의 자취를 쓸어버렸던 셈이다.

로마를 보다 많이 파괴한 주인공은 로마와 이탈리아 자신이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역사교육학)의 저서 ‘나의 서양사 편력’에 따르면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후대의 예술가와 로마인들이 더 많이 파괴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복고 열풍을 타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양식을 재현한다며 오래된 건축물에서 기둥을 뽑아 건축자재로 썼다. 로마가 복구되면 될수록 ‘옛 로마’는 파괴된 것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일부 예술가들이 이 같은 짓거리를 비난해도 대부분 무시 당했다.

‘반달리즘’이라는 용어도 반달족의 침입 직후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에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 정치의 주역인 급진 자코뱅당이 자행한 파괴 행위를 성직자인 앙리 그레구아르가 반달족이 저지른 범죄행위와 비교하며 처음으로 썼다. 앙리 그레구아르는 가톨릭 성직자이면서 혁명에 적극 참여해 노예제와 유대인 차별 폐지, 표준 프랑스어 보급에 앞장섰던 인물이지만 ‘반달족은 야만인이며 서구 문명의 파괴자’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달족과 반달리즘의 유래에 관련한 편견은 기록화에도 남아 있다. 러시아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칼 파블로비치 브률로프가 19세기 중엽에 그린 작품 ‘가이세리크의 로마 침략’을 보자.* 옷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피부도 거무튀튀한 반달족 병사들이 하얀 피부의 로마 부녀자들을 유린하고 있다. 사실과 부합할까. 게르만족인 반달족의 주력 병사들은 라틴족인 로마시민보다 피부가 희고 키도 더 컸다. 당시 반달족은 이미 라틴 문명을 받아들인데다 지중해 무역과 해상 약탈로 무장과 의복도 로마에 뒤지지 않았다. 반달족과 반달리즘의 선입견과 편견은 사라졌을까.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형됐다고 말하면 과할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브률로프의 작품에서 중앙에 나오는 여인 둘은 황후였던 에우독시아와 그 딸이다. 에우독시아는 카르타고에서 7년을 보낸 뒤 석방돼 여생을 동로마제국에서 보냈다. 레오 1세의 간청 덕분이다. 그림에서 레오 1세는 혼란 속에서도 근엄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거듭된 위기에서 로마의 피해를 최소화한 레오 1세는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시민들의 교황에 대한 존경과 충성은 종교의 영역에 머물던 교황의 권위가 정치로 확장되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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