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계는 한국 경제, 특히 산업계에 위기가 닥쳤다고 본다. 다만 대외의존도가 큰 한국 경제의 특성상 세계 경제 회복세에 그 위기가 가려져 있을 뿐, 급변하는 정책환경에 따른 개별 기업의 위기는 심각하다는 게 경총의 분석이다. 경총이 최근 237개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절반가량이 현 경기를 ‘장기형 불황’으로 진단하고 300인 미만 기업의 절반 정도가 내년에 긴축경영을 펴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업계 도처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뜻이다.
산업계는 특히 정부의 친노동 기조에 따라 노무 관련 환경이 바뀐 것이 가장 큰 리스크라고 우려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내 하청 금지,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통상임금 확대 등을 동시에 직면해 인건비 부담이 일시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다. 정책 변화로 인한 비용 상승을 버티지 못하면 수많은 기업의 생존이 단기간에 어려워질 게 명약관화하다.
경총의 한 관계자는 “특히 노동 정책에 따른 위기감이 팽배한데 일부 업종의 호황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라면서 “어려운 업종에 부담을 가중시킬 게 아니라 호황인 업종에 대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게 옳은 정책 방향”이라고 말했다.
업종별로 보면 자동차의 경우 내년이 위기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세계 1·2위 시장인 중국과 미국에서의 부진을 내년에 극복하지 못하면 위기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대·기아차는 회사를 둘러싼 경영환경이 내년에도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법인세 최고세율이 높아져 내년 세 부담이 늘었고 대체근로 허용 등 노동 관련 법률 개정 움직임이 없어 노무 리스크도 여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기에 내년 사상 최초로 중국 자동차 수요가 역성장하는 등 미중 양대 시장의 축소까지 예상돼 이중고를 겪을 것이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가장 큰 한숨소리는 자동차부품 업계에서 나온다. 사내 하청 금지, 통상임금 확대로 다수 업체가 홍역을 치른 데 이어 내년에 최저임금이 오르고 근로시간 단축까지 현실화하면 업계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린다. 원청 대기업에 대한 피라미드형 납품 구조여서 그러지 않아도 마진이 박한데 노무비가 일시에 증가하면 감당해낼 수 없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특히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하려면 설비를 늘리고 인원을 추가 채용해야 하는데 이는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자와 반도체, 정보통신기술(IT) 업종의 경우 현재 호황이라고는 하나 미래 경영환경에 대한 확신이 없어 적극적인 투자를 자제하는 모습이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 정책에 비교적 우호적으로 대했던 기업들 역시 최근 정부의 ‘일방통행’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경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부지 제공에 따른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서도 정부 정책에 호응해 3년간 1만명 정규직화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에 발목이 묶여 신동빈 회장에게 지난 14일 징역 4년이 구형되자 더욱 허탈해하는 모습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기업을 동반자로 규정해놓고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기업과 대화하거나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거의 없다”고 한숨지었다.
/맹준호·박성호기자 nex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