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한 공중동작을 선보이는 스코티 제임스. /AFP연합뉴스
‘러셀 크로 효과’라는 말이 있다. ‘글래디에이터’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크로는 호주 출신이지만 이 사실을 아는 미국인은 많지 않다. 이처럼 호주 사람이 미국에서 굉장히 유명해지고 미국인들이 그를 자신들과 같은 미국인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러셀 크로 효과라고 부른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하프파이프의 금메달 1순위로 꼽히는 스코티 제임스(23·호주)도 미국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2주 전 콜로라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한 사진기자는 제임스의 경기 장면을 전송하며 ‘미국의 제임스’라고 적었다. 이 종목은 전통적으로 미국 선수들이 워낙 강세였다. 또 호주는 스노보드보다는 파도를 가르는 서핑보드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하면 2006 토리노, 2010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제’ 숀 화이트(31·미국)를 떠올리겠지만 ‘요즘 대세’는 단연 제임스다. 스폰서 수입만 수백만달러인 그는 올해 X게임과 평창 테스트이벤트(올림픽 사전점검 대회), 세계선수권 등을 모조리 제패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16세 때 처음 올림픽(밴쿠버)에 나가 화이트의 위엄에 혀를 내둘렀던 제임스는 2014 소치올림픽에 이어 평창이 세 번째 올림픽이다. 밴쿠버 때는 당시 전 종목을 통틀어 남자 선수 중 제임스가 최연소였다. 이전 두 차례의 올림픽과 완전히 다르게 이번 올림픽에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수식어와 함께한다. 제임스는 평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자신이 ‘호주가 낳은 제임스’임을 온몸으로 외칠 생각이다. 제임스의 고향은 멜버른 인근 워런다이트. 1800년대 호주 빅토리아주를 강타한 골드러시의 본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제임스는 “인생의 대부분을 워런다이트에서 보냈다. 올림픽 금메달을 내 고향에 바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일 것”이라고 했다.
스코티 제임스가 빨간 글러브를 낀 캥거루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임스는 캐나다 휘슬러로 가족여행을 갔던 세 살 때 처음 스노보드를 탔다. 아버지가 사준 10달러짜리 보드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주니어 무대를 평정하고는 본고장 미국으로 홀로 건너가 외로운 싸움에 뛰어들었다. 낯선 환경과 편견 속에서 꿈을 키워온 그는 자신을 ‘파이터’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무하마드 알리나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등 복싱 전설들의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한다.
올해부터는 아예 복싱 글러브 모양의 빨간 장갑을 끼고 경기에 나선다. 키가 195㎝나 되는 제임스가 장갑을 낀 모습은 정말 호주올림픽위원회의 마스코트인 빨간 장갑을 낀 캥거루 같다. 제임스는 “사람들에게 내가 호주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복싱하는 캥거루처럼 빨간 장갑을 벗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0대 후반에 키가 끊임없이 자라는 바람에 부츠와 보드를 계속 바꿔야 했던 제임스는 하프파이프에 장신은 불리하다는 통념도 산산이 깨부쉈다. 경기 배경음악으로 최신 유행음악 대신 1950~1970년대 음악을 고집하는 등 모든 면에서 남다른 호주 최고의 스포츠 스타다. 고난도 기술인 ‘스위치 백사이드 더블콕 1260(세 바퀴 반 회전의 일종)’을 평창에서 성공해 보이겠다는 제임스는 “글러브에 ‘제임스 이즈 레디(준비는 끝났다)’를 적고 평창으로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는 원통을 반으로 자른 모양의 슬로프에서 연기하는 스포츠로 평창올림픽에서 가장 흥미로운 묘기를 선사할 종목 중 하나다. 국내 1인자는 지난 21일 월드컵에서 8위에 오른 이광기(24)이며 평창올림픽 남자 예선은 내년 2월13일 휘닉스 스노경기장에서 벌어진다. 결선은 2월14일이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