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골목길 역사산책:서울편] 거목의 발자국 밟으며…나를 찾는다

최석호 지음, 시루 펴냄

서울 가회동의 북촌 한옥마을. 일제강점기 한양에 마지막 남은 택지 북촌을 두고 조선인과 일인 사이에 한바탕 땅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독립운동가이자 건축왕 정세권이 조성한 곳이다. 그가 지은 조선집 중 90동은 여전히 가회동에 남아있다. /서울경제DB

“한 장소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기억과 연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유와 혁명의 걷기를 예찬한 저술가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걷는 행위를 기억과 연상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발견하는 것에 빗대며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비단 솔닛 뿐만이 아니다. 거창한 인물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범인들 역시 걷고 뛰고 응시하며 사유한다. 누군가는 발 아래 축적된 과거를 만나기 위해 걷고 누군가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걷는다. ‘골목길 역사산책 : 서울편’은 그런 책이다. 조선의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해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 고유색을 드러냈던 16~18세기 진경시대에서 힌트를 얻었다. 인조반정 성공 후 벼슬길에 오르는 대신 조선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린 창강 조속(1595~1668), 전국을 두루 걸으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1676~1759), 진경시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삼연 김창흡(1653~1722)과 이를 완성한 사천 이병연(1671~1751) 등이 저자에게 길을 내줬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묻기 위해 저자는 조선 건국부터 시작해 역사를 걷기로 했고 그렇게 이어진 길이 부암동(무릉도원길), 정동(역사길), 북촌(개화길), 서촌(조선중화길), 동촌(문화보국길)으로 닿았다.



근대까지 역사의 중심지였던 거창한 골목들을 목적지로 정했으니 책에 소개된 인물과 장소의 면면도 화려하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걷기 시작한 책의 목적, 골목길이라는 단어가 불러온 변방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과 달리 저자가 만난 인물들은 대문자 히스토리의 주인공들이고 장소들 역시 기록의 특권을 누린 곳들이다. 아마도 저자는 부암동 석파정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을, 정동길에선 백정과 범부의 애국심이 뒷받침돼야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룬다며 자신의 호를 백범이라 지은 김구 같은 거목을 만나며 뿌리를 확인한 모양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 별당 /서울경제DB

물론 서울의 역사산책을 돕는 안내서라고 하면 그 목적에 더 없이 충실하다. 철저한 자료 조사, 시대별로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저자의 솜씨 덕에 걸음마다 이야기가 피어난다.

특히 일제강점기 가회동 북촌한옥마을을 만든 건축왕 정세권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살집이 모자라고 땅값이 치솟았던 당시 한양에 마지막 남은 택지 북촌을 두고 조선인과 일인 사이에 한바탕 땅 전쟁이 벌어졌는데 서양식 문화주택을 지으며 야금야금 북촌을 갉아먹는 일인들에 맞서 113동의 조선집을 지은 이가 정세권이다.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자리잡은 익선동 한옥마을 역시 그의 작품이다. 독립운동가로는 드물게 큰돈을 만졌지만 그의 말년은 어두웠다.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 출간을 돕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 그는 뚝섬 일대 큰 땅을 강탈당했고 광복을 되찾은 뒤 정부에 토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지만 좌절됐다.

그러나 그가 지은 조선집 중 90동은 여전히 가회동에 남았다. 이 책을 들고 그가 지은 집을 맞닥뜨리는 순간은 낯설었던 이름이 가회동 골목길 위에 돋을새김하는 시간일 것이다.

어느덧 걷기 좋은 계절이 됐다. 안내서는 말 그대로 첫발을 떼게 한다. 걸음걸음 그 안의 숨겨진 사람 이야기, 역사를 일궜던 장삼이사의 삶을 벼려, 내 것으로 삼는 것은 독자, 순례자의 몫이다. 1만7,000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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