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2월 미국 행동주의 펀드인 서드포인트는 일본 자동공정 산업 기업 ‘화낙’에 서신을 보냈다. 지분 1.4%를 보유한 주요주주라며 “기업 이익을 사내에만 보유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드포인트는 배당 확대 및 85억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요구했다. 각종 분쟁에 따른 기업가치 훼손을 우려한 화낙은 서드포인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화낙은 2015년 4월 △5년간 이익의 최대 80% 주주에 환원 △배당성향 30%에서 60%로 확대 △자사주 5% 외 소각을 약속했다. 이후 화낙 주가는 급등했고 서드포인트의 보유지분 가치도 높아졌다. 하지만 2015년 3·4분기부터 화낙의 성장은 정체됐다. 투자재원을 모두 배당에 쏟아 부은 탓인지 2015~2016년 화낙의 순이익은 전년 대비 최대 40%까지 급감했다.
화낙의 사례는 최근 속도감 있게 지배구조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상법개정을 통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국내 환경에 다양한 메시지를 던진다.
삼성에 이어 현대차를 타깃으로 삼은 엘리엇매니지먼트 운용자인 폴 싱어와 기업사냥꾼으로 알려진 칼 아이컨 등은 새로운 규제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들은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접근한다. 마치 주가 상승을 바라는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윔블던 현상’이 심한 국내 자본시장은 해외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윔블던 현상은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주최국인 영국보다 외국 선수가 더 많이 우승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 대형증권사 고위임원은 “헤지펀드의 요구대로 유보금으로 배당을 확대해 단기간에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과 유보금을 인수합병(M&A)에 써 기업 가치를 올리는 것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주주환원 정책인지 고민해봐야 한다”며 “행동주의 투자가들이 과연 선의의 목적으로 기업에 접근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윔블던 현상이 강해질수록 단기차익을 노린 헤지펀드에 한국시장은 현금지급기(ATM)일 뿐이다.
◇반기업정서 등에 업고 활개치는 벌처펀드=삼성·SK·현대차·소니·교세라·소니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주요 기업들은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소위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아시아 기업들은 유독 행동주의 투자가에 취약한 편이다. 아시아 기업은 보통 설립 100년 전후에 창업주에서 2~3세로 경영권을 승계해 경영권 방어에 취약한 편이다. 여기에 보수적인 경영방식으로 사내 유보금을 쌓고 회계기준이나 경영관리 방식이 미국과 달라 기업가치가 저평가돼 있다. 행동주의 투자가들이 달려들기 좋은 먹잇감인 이유다. 한국은 여기에 더해 주요 대기업들이 정부의 특혜로 성장했다는 반재벌정서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포퓰리즘을 악용해 여론을 등에 업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인 행동주의 투자가들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 주식시장에서 주주들의 평균 주식보유 기간은 8.6개월로 144개국 중 네 번째로 짧은 것으로 나타나는 등 단기실적에 집착하는 편인 점도 한국 시장에 유독 공격이 많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발 더 나아가 행동주의 투자가들의 이러한 공격은 국내 기업의 경영권도 위협한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적대적 M&A 등을 통해 수익을 능동적으로 창출해가기 때문에 종전과 같은 수준의 외국인 비중이라도 국내 기업이 느끼는 경영권 위협의 정도는 더 심하다. 한 법무법인 고위관계자는 “스튜어드십코드 구축은 전 세계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해외에서는 주주권익 향상과 동시에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장치도 마련한다”며 “지금의 방향은 행동주의 투자가의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업계 “경영권 방어에 4차 산업 투자 위축 우려”=전문가들은 정부가 드라이브를 거는 지배구조 개편작업과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임, 전자투표제 도입 등 상법개정안은 기업이 단기실적에 집착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단기실적이 좋지 못하면 행동주의 투자가들이 경영자 교체, 사업방향 수정 등 사사건건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경연은 지난해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을 분리해서 뽑을 경우 10대 기업 중 6곳의 감사위원 자리를 투기자본이 싹쓸이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대주주나 경영진의 전횡을 막기 위해 도입한 감사위원회 제도가 투기자본의 기업장악 도구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다.
경영권 보호장치가 미흡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행동주의 투자가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과도한 자금을 투입하면 중장기 성장동력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가 위축된다고 우려했다. 삼성전자나 SK가 과감하게 반도체에 투자하고 바이오 같은 신사업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성장동력 마련을 위한 장치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내 4대 기업 고위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을 위해 규제를 풀겠다고 하지만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기업들이 점점 더 경영권 유지를 위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고말했다. /강도원기자 theone@sedaily.com